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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8 군사연구 제127집 분석이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당시 독일군 병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받은 에이트켄 소장은 11월 5일 대규모의 영국군 병력을 상륙시켰다. 전쟁 에 투입된 영국 병력은 8,000여 명에 달했다. 이에 대항하는 포르베크는 병력을 보강해 1,000명의 병력으로 영국에 맞섰다. 병력수가 8대 1로 영국군이 압도적이 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독일군 병력은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포르베크 장군은 동원한 모든 부대를 탕가로 집결시켰다. 독일은 잔인하고 호전적인 1,000명의 원 주민 병사들을 독일군 장교들의 엄격한 교련으로 훈련시켰다. 그들은 야지(野地) 를 뒹굴면서 근대적 전기를 연마한 강병들이었다. 독일군은 원주민들에게 적과의 교전방법뿐만 아니라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법, 사자와 전갈에 익숙해지게 만드 는 방법까지 교육시켰다. 또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지형 구석구석을 모두 외우 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의 에이트켄 소장 말처럼 영국군이 진격하면 그냥 손들 고 나올 병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첫 전투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영국군 은 이번에도 아무런 사전 정찰 없이 작전을 강행했다. 이에 반해 독일의 포르베 크 장군은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탕가를 정찰했다. 심지어 영국군 점령 지역을 통과하기도 했다.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럽 서부전선에서 사용된 신 전술로 무장한 독일군이었다. 진흙 댐과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좌로 구축된 견고한 방어망이었 다. 영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 기관총좌는 밀림의 늪지를 헤쳐 나오 느라 허우적거리는 영국의 인도병사들을 쓸어버렸다. 영국군의 피해가 속출했 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병력이 우세했던 영국군은 독일군의 일부 방어진지를 뚫고 시내로 진입했다. 이 부대가 용맹하기로 소문난 북 랭커셔 부대와 구르카 부대이다. 이들은 흑인 원주민과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세관을 점령하고 영국 기를 내걸었다. 용맹한 흑인 원주민 아스카리스도 구르카 용병의 무지막지한 저돌성에 겁을 집어 먹고 말았다. 구르카12)는 네팔 인들이다. 히말라야의 거친 환경에서 자란 전사로 12) 네팔의 중부 및 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강건(剛健)한 농경민으로 목축도 겸하고 있다. 원 주지는 인도 중부였으나, 힌두교도라는 이유로 14세기경 이슬람교도에게 쫓겨 북쪽 네팔 로 이동, 그곳의 지배 민족이었던 네와르족(族)을 정복하고 이들과 혼혈(混血)하게 되었 다. 1814년 치열한 산악전 끝에 영국군에게 패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의 용병(傭兵)으로 활약하여 네팔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