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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63 때쯤 포르베크가 이끄는 독일군의 병력은 독일군 장교 200명에 아프리카 원주민 인 아스카리스가 2,500명 정도 되었다. 원주민들의 봉기를 진압하며 동아프리카의 지형과 날씨를 파악해 놓았던 포르 베크 장군은 킬리만자로에 있는 영국령을 공격했다. 포르베크가 이끄는 병력은 아주 적은 양의 탄약과 물자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끈 기습공격은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였다. 포르베크는 타베타에서 영국의 철도역을 점령했다. 많은 영국 군 진지와 20여대의 기관차들과 수마일의 철로가 파괴되었다. 포르베크의 ‘히트 앤드 런’ 식의 게릴라전법에 영국식민지군은 너무나 무력했다. 포르베크는 공격을 할 때 철저히 지형과 날씨를 파악해 공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포르베크는 기습작 전을 수행하는 중에도 새로운 병력을 꾸준히 모집하였다. 탄자니아 전국으로 새 로운 아스카리스들을 징집하기 위해 독일 장교들과 아스카리스 하사관들을 보냈 다. 그는 싸울 수 있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지원군으로 편입시켰다. 유능한 사람 들은 누구라도 붙들어 독일군에 복무시켰다. 포르베크가 영입한 인재 중에 최고 는 독일의 작센(Sachsen) 군대에서 소장으로 복무했던 바흘레(Bahle)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아프리카에 있는 아들 집에 와 있었다. 바흘레(Bahle)는 포르 베크(Vorbeck)보다 계급이 높았었지만 기꺼이 포르베크 밑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수송 업무를 맡은 바흘레 덕분에 독일군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물자를 적시에 공급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작전의 효율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인종 아프리카 병사들에게 죽어가는 대영제국의 병사들!” 영국신문에는 매 일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유린당하는 기사가 실렸다. 자극적인 기사에 영국국민들 은 분노했다. 영국국민들은 ‘아프리카 파병!’을 외쳤고, 영국정부는 어쩔 수 없이 아프리카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Ⅴ. 탕가(Tanga)전투 영국정부는 비록 파병을 결정했지만 유럽 전선에 있는 영국군을 뺄 수는 없었 다. 1914년 10월 영국은 인도에 주둔하던 이트켄(Aitken) 소장을 아프리카 원정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북 랭커셔(Lancashire) 연대의 1개 대대와 구르카 (Gorkha) 용병부대, 그리고 인도인들로 구성된 약 8,000명의 병력을 차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