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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프리카 전투와 포르베크 장군 62 군사연구 제127집 독일 병력은 초기에는 백인 장교 몇 명과 수백 명의 아스카리스(Askaris) 원주민 병사들로 이루어졌다. 물론 이들이 보유한 무기는 형편없었다. 이들은 구식 모젤 1871 소총으로 무장했다. 이 소총은 단발식이며 흑색 화약을 사용했는데 한 발 쏠 때마다 흰 연기구름이 생겼다. 구식 모젤 소총은 전쟁에서 쓰기에는 형편없는 소총이었다. 포르베크 대령은 베를린에 새로운 소총을 보내달라고 끊임없이 청원 했고 숫자는 적지만 기관총과 성능 좋은 소총을 구할 수 있었다. Ⅳ. 동아프리카 전쟁발발과 초기전투 독일 총독 하인리히가 꿈꾸던 동아프리카의 평화는 독일의 순양함 때문에 깨져 버렸다. 독일 순양함 쾨니스베르크(Konigsberg)호가 영국의 시티 오브 윈체스터 (City of Winchester)호를 공격한 것이다. 분노한 영국은 즉시 쾨니스베르크 (Konigsberg)호를 찾아 출동했다. 영국 해군의 중순양함 2척은 쾨니스베르크호 (Konigsberg)가 출항했었던 탄자니아의 항구도시 다르에스살람8)에 진입했다. 그 곳에 독일 순양함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영국 해군은 그곳에 있는 무선 송 수신 탑을 포격했다. 하인리히 총독의 평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동아프리 카로 옮겨 붙은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하인리히 총독은 내륙 깊숙이 도망쳤다. 이젠 영국에 대응하거나 항복하는 것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동아프리카 독일령 식민지에서 군사지휘관은 포르베크 장군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상당 부분 배려하는 총독의 정책에 찬성했었다. 다만 앞으로 동아프리 카에서 전쟁이 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총독과 달랐다. 총독에게 싫든 좋든 전쟁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건의는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 군인이라면 적국에게 타격과 부담을 주어 야 한다고 믿었다. 유럽에서 독일과 대치하고 있는 영국의 군사들을 아프리카로 끌어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믿었다. 그는 프린츠 등을 시켜 소수이긴 하지만 원주민과 독일 장교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어 강군으로 훈련시켰다. 전쟁에 돌입할 8) 인도양에 면한 무역항으로 아랍어(語)로 ‘평화의 항구’를 뜻한다. 이는 1862년 잔지바르 제 국의 술탄(회교국의 군주)이 축항하였기 때문이다. 항만시설은 1956년 근대화되었고, 잠비 아로 통하는 철도는 중국의 기술 및 자금 원조를 받아 1975년 10월 개통되었다. 항구에서 는 담배·차·커피·피혁·사이잘삼 등을 수출하며, 이 나라 해운의 80%를 취급하고 있다. 1884년 독일에 의해 점령되어 1891년부터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정청소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