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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43 종군 기사가 있으며, 그는 1918년 9월 27일 유럽전장에서 전사하였다.55) 특히, 앞 서의 문단에서 언급한 1917년 7월 징병법에 의해 스탁튼에서 징병에 선발되었던 한인 8명 가운데 한 명이었던 리조지라는 인물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한 재미 언론인이 그 행적을 발굴해 국내 주간지에 보도한 바 있어 크게 참 고된다. 이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한인의 모습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 가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미국 일간지『스탁튼 데일리 레코드(Stockton Daily Record)』 1918년 12월 18일 자에는 ‘조지 리, 명예와 아내를 얻다(George Lee wins honors and bride)’라는 제목으로 조지 리라는 전쟁영웅에 관한 기사를 지방면 머릿기사로 쓰고 있다. 이 에 따르면 1896년 제물포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903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리조지는 캘리포니아 북부 맨티카(Manteca)에서 사탕수수 농사를 짓다가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언하자 미국 육군항공대에 자원 입대했 다. 군인이 된 리조지는 1918년 뉴욕 롱아일랜드의 미첼 필드(Mitchell Field) 비 행학교를 졸업해 한인 최초의 정식 파일럿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유럽 전선으로 배치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려 156회나 되는 무사고 출격을 기록해 지휘관으로부터 훈장의 일종인 미국 육군항공대 공훈반지(meritorious ring)를 받 고 최종계급 상사, 21세의 나이로 명예 제대하였다.56) 이 밖에도 1919년 7월 17일자에 보면 클리몬트 학생이었던 오관선이란 한국인이 1918년 6월에 군인으로 선발되었고 훈련기간 중 종전이 되어 퇴군하여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 한다는 기사가 있고, 하와이 군영에 한국인이 총 90여 명인데 그 중 55)『신한민보』1917년 7월 11일 3면「박장순씨 간 후의 기념」, 1919년 2월 27일 3면「박장순 씨는 세계민주를 위하여 유럽전장에서 전망」. 56) 비행(조종) 부사관은 2차 세계대전 초까지도 일부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급에 대해 서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소수인종학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당시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합 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리조지가 파일럿 자격을 획득하긴 했어도 아시아계로서 장교 계 급장을 달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특종 재미언론인 한우성씨 발굴기록 - 1918년 1차 대전 참전해 156회 출격, 한인 최초 파일럿은 ‘조지 리’였다」,『주간조선』 2045호[2009년 3월 9일]). 스탁튼 데일리 레코드 기사를 발굴한 언론인은 1917년 6월 5일 작성된「미군 징집제 등록카드」를 보완자료로 활용하였는데, 카드에는 그의 국적에 대해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 국적자’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신한민보』에서 징병등록시 징병을 피하려면 국적을 ‘KOREA’로 표기해야 함을 지속적으로 안내했었지만 입대시 법 적으로는 일본인 표기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연합국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인 신분이어서 입대가 용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