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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240 군사연구 제127집 으로 1917년 4월 이후 각월 한 개 호의 논설과 전쟁 전보를 번역하여 제출하면서 다른 영문보(the San Francisco American Newspaper)를 단순 번역한 것일 뿐이 며『신한민보』역시 다른 미국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참전을 응원한다는 안내문을 함께 발송하기도 했다.39) 또한『신한민보』를 포함한 ‘외국인신문연합회’ 는 미군에게 구호품을 보내기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기도 하면서40) 전시 통제기 를 보내야 했다.41)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 보도내용이 제한되었을 것은 충분히 예 상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초기 한인들의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연합국의 승리 로 귀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다음 기사들과 같이 미군의 승전보도에 주력하 였다. 머니강 격전에 미군승리의 보도가 미국에 달한 후 전국이 열광이 나서 축하식을 거행하는데 특히 상항 전장 박람회는 2천M에 대행렬을 행하얏고...(하략)42) 건국당시의 정의를 가지고 대전란 파란 즁에 몸을 적시워 덕국 동맹 측 즁에도 더욱 덕국의 군국주의를 처멸하고 건국 이래 국시라는 민족주의 참뜻을 실현하 야 인류의 영구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야 이제 태서양 져편에 보내여..(하략)43) 그리고 독일의 전쟁수행과정에서의 비도덕적인 만행을 부각시키는 한편, 조만 간 그러한 위기가 미국인들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내용에 관한 기사도 함께 실 었다. “덕인은 벨지엄에셔 부인녀자에게 만행을 행하얏다 덕인은 쟝차 제군의 어머니, 자매, 졍인에게도 이와 갓치 하리라”하매...(하략)44) 39)「미 체신국 법무관→신한민보사(공함, 1918. 2. 14)」,「이대위→미 체신국 법무관(공함, 1918. 3. 20)」『미주국민회자료집19』, pp.604~606. 40)『신한민보』1917년 8월 23일 2면「구주출전 미국을 위하여」. 41) 당시 미국의 노련한 신문기자인 조지 크릴(George Creel) 같은 이는 정부의 공식 전쟁 선전가가 되어 전쟁의 정당성을 미국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공보위원회(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를 설립해 7만 회가 넘는 연설회를 수행하는 등 전쟁에 대한 미국민 의 여론을 선도하고자 했다. Howard Zinn, 유강은 역,『미국민중사2』, 시울, 2006. p.19. 42)『신한민보』1918년 7월 25일 3면「미군승리를 축하-전쟁 박람회의 행렬」. 43)『신한민보』1918년 7월 11일 3면「천고에 굉장한 전시중 미국의 독립축전의 대성황」. 44)『신한민보』1918년 7월 25일 3면「미인의 해군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