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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238 군사연구 제127집 예전에 군사를 잘 거느려 능히 군사로 하여금 죽을 땅에 나아가게 하던 자는 한 국에는 충무공, 중국에는 오기를 일컫더라. 저가 잔약불완전한 군사를 거느려 전 첩의 완전한 공을 거두는 것은 위령이나 무력으로 시키는 것이 아니오, 평일 군 사의 마음을 얻는 깨달음이라. 그러하니 은혜로 맺으며 군율로 달고 쓴 것을 같 이 하고 상벌이 분명하면 군사를 거느리는 법에 다하였다 할지라. 근세에 군사를 잘 거느리는 자는 그 덕황가이사인져 니지하슈의 싸움에 당하여 덕군의 전망군사의 죽음이 산같이 쌓고 중상하여 혈육이 낭자한 자는 더욱 많아 임시 병원과 및 부근 백성의 집이 빽빽하게 들어차고 즉황제주필한방에 또한 침 상한 의자 외에는 겨우 몸을 들여놓을 만하거늘 덕황은 오히려 시종관을 명하여 침상을 들어내고 자리를 비어 상한 군사를 뉘이고 기운이 세계를 삼키려는데 황 제가 밖에 나아가 마른 풀을 깔고 누웠으니 어찌 그 존귀함을 잊음이리오. 실상 은 군사를 죽게코져함이라그런고로 이번 싸움에 덕국이 지나는 곳에 당하는 자 가 없어 천만리에 종횡하야 온 유로바를 거의 유린하였고 이십육연방 덕의지는 금탕 같은 관도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으니 오호라 이 어찌 용이한 일인가.33) 이 글에서 독일의 황제를 충무공, 오기 장군에 비유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비록 독일 황제가 군사, 즉 국민을 전장에 내보내어 죽음으로 몰고 있다고 하면 서도 엄격한 군율과 분명한 상벌로 군사를 잘 거느리고, 국민들과 고통을 나누면 서 전쟁을 수행하여 유럽을 거의 석권할 수 있는 솔선수범, 지도력을 갖고 있었 다면서 감탄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사실, 독일황제에 대한 호감은 같은 시기 다 른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중국지역에서는 왕정체제를 유지하던 독일이 성공적인 부국강병을 이룬 사례를 통해 복벽주의의 기운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에 신한혁명당은 한국에서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 켜 망명정부의 수립을 추진한 바 있다. 이는 왕정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재고와 더불어, 왕정이 개전 초기 승승장구하던 독일과 원세개가 황제에 오른 중국과 연 합하는데 일조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한 실리적인 부분이 있었다.34) 하지만 1910년대 중국ㆍ러시아와는 달리 미주지역 민족지도자들과 한인사회는 공화주의 와 복벽주의간의 갈등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공화정에 대한 지지가 확고 33)『신한민보』1916년 5월 4일 3면「덕황의 웅심한 장략」. 34) 독일에 대한 시각과 관련하여 이는 미주한인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며 해외의 한인사회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룬 시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결성된 신한혁명당의 경우 독일의 승리를 예측하였고, 전후 독일의 원조를 받으려고 하였다. 강영심,「신한혁 명당의 결성과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pp.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