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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234 군사연구 제127집 앞 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신한민보』가 전쟁관련 기사를 많이 다루지 않아 독자들이 항의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신한민보』는 본보가 일주일에 한 차례 발 간하는데, 전쟁만을 다루는 신문이 아닌 이상 현재보다 더 많은 전황보도를 할 수 는 없음을 분명히 설명하며 양해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하와이의『국민 보』에서는『신한민보』에 비하여 전쟁문제를 더 많이 다루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신한민보』는 그 이유를『국민보』의 성격에 돌리고 있다.21) 그럼에도 이 시기『신한민보』를 살펴보면 전쟁관련 소식은 결코 적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고 정란 이외에도 논설, 잡보 등에서 전쟁관련국의 기사, 전쟁체험기를 꾸준히 게재 하였다. 하지만 독자들의 큰 관심은 상당했다. 어쩌다 전쟁관련 소식을 충분히 게 재하지 못할 경우 신문사측에서는 지면상의 양해를 구해야 할 정도였다.22) 이러한 독자의 관심이 증폭됨에 따라 신한민보 측에서 어느 정도 조치를 취하 였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전쟁과 관련하여 보다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구하 기 위하여 노력했던 것 같다. 1915년도 국민회 사업성적 보고서 6조에는 신문기 사건과 기타 동포의 형편을 수시보고케 하기 위하여 각지에 통신원을 지정하여 위임하고 있는데,23) 이러한 통신원의 증가는 전쟁의 발발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실제 1911년 10월 신해혁명 발발후인 1912년에도 북경에 주재하던 인사를 통신원 으로 위임하였던 사례가 있음을24) 고려한다면 미국내든, 유럽ㆍ아시아 등의 국외든 통신원을 증원하여 유럽의 전쟁 소식을 전하려고 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2. 전쟁에 대한 한인의 시각 당시 발발한 전쟁에 대해『신한민보』에서 바라보는 전쟁의 원인은 각국의 실 업과 상업에서의 경쟁에 있음을 들고 있다. 21)『국민보』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1913년 8월부터 발행되었던 신문으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주필은 박용만이었다. 네브라스카 지역에서 소 년병학교를 설립하여 3년간 사관 양성에 진력했던 박용만은 1912년 12월부터 하와이로 가서『국민보』의 전신인『신한국보』의 편집장을 맡는 한편, 군인양성운동을 통해 1914년 6월에는 국민군단을 창설하였다(김원용,『재미 한인 50년사』, 캘리포니아 리들리, 1959, pp.342~350). 따라서 박용만이 주필로 있는 동안은 전쟁에 대한 기사가 중점적으로 게재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영향으로 당시 하와이지역의 한인사회는 미국 본토지역보 다 상무적인 분위기나 전쟁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2)『신한민보』1915년 1월 28일 3면「편집실 통고」. 23)「1915년도 사업성적보고서」,『미주국민회자료집18』, p.211. 24)「신한민보사장→조욱(조성환)(위임장, 1912)」『미주국민회자료집19』pp.592~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