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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232 군사연구 제127집 이었다. 1910년 국치 전후 하와이 지역에 있었던 군인양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박용만은 1914년 6월 국민군단을 조직하고, 8월 병학교를 창설하였다. 미국 영토 에서 외국인의 군사활동은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국민군단은 하와이 미군사 령부의 호의로 미국 군제를 사용할 수 있었다.15) 국민군단의 창설이 가능했던 것 은 미주한인들의 군인양성 노력 이외에 당시 미국내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았 다.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미국의 국가 권력층이 한국인의 군사훈련을 호의적으로 받아주었던 것이다.16) 그러나 국민군단은 1916년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해체되고 말았는데, 여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도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세계대전 발발 직 후까지도 악화된 상태였던 미일관계가 전쟁 발발을 계기로 호전되면서 더 이상 하 와이에서 사관양성이 어렵게 된 외부적 요인이 있었던 것이다. 1915년 여름 주미 일본공사가 미국무장관에게 박용만의 활동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한 결과 내무부는 하와이총독에게 공문을 통해 관련된 실태조사를 지시하였던 것이다.17) 미국과 일 본과의 갈등을 전제로 한 미주한인들의 군사활동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국민군단의 해체 이후 사실상 미주한인의 군인양성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Ⅲ.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미주한인의 반응 1.『신한민보』의 전쟁 소식 보도 신한민보는 창간목적에서 밝히고 있듯이18) 국제정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전쟁 이전까지 세계정세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1914년 8월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신한민보』는 즉시 이를 기사화하여 전쟁상황을 한인 들에게 보도할 수 있었다. 독일의 선전포고가 있은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았던 8월 15) 그러나 총기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훈련은 목총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목총 이외에는 단총(短銃)과 군도(軍刀)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원용, 위의 책, pp.342~345. 16) 서대숙,「박용만과 그의 혁명과제」,『한국민족학 연구』4, 단국대학교 한국민족학연구소, 1999, p.19. 17) 반병률,「미주지역에서의 무력양성운동 -일제초기를 중심으로-」,『미주한인의 민족운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3, pp.182~183. 18)『신한민보』1909년 2월 10일 1면「본보의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