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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31 세우고 있었다.10) 이와 같이 1907년에 조직된 일부 하와이 한인단체들이 ‘무예장려’를 표방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군인양성운동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미주지역에서 체계적인 군 인양성운동의 선구는 박용만의 네브라스카(Nebraska) 소년병학교였다. 박용만의 구상은 둔전병식에 따라 사관을 양성하여 독립전쟁의 무대가 될 만주, 연해주로 옮겨 가서 독립군부대 편성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박용만은 여러 동지들과 함 께 군인양성을 위한 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고, 1909년 6월 마침내 커니 (Kearney)농장에서 제1기생 13명으로 소년병학교를 개교하였다. 이후 한인소년병 학교는 다음 해인 1910년 6월 헤이스팅스(Hastings) 대학의 후원으로 교실과 운 동장을 사용하게 되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기숙사에 머물며 미국 군사학원의 인정된 과정을 밟았고, 방학을 이용하여 6~9월 3개월간 군사조련 등 의 활동을 했다.11) 소년병학교를 필두로 1910년 10월 북미지방총회에서는 LA 클레어몬트(Claremont) 학생양성소에 군사훈련반, 롬폭(Lompoc)에 의용훈련대, 11월에는 캔사스(Kansas) 에 소년병학원, 12월에는 와이오밍(Wyoming) 슈페리오(Superior) 지방에 청년병 학원이 조직되어 매일 저녁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12) 또한, 직접적인 군사교육 뿐 아니라 군인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농업과 상업 등 실업활동을 통한 이익을 사관 양성비로 제공하려는 움직임도 지속적으로 이어 졌다.13) 특히, 1910년 여름 일본의 한국 강점이 현실화되자 미주에서도 각계의 여러 단체들을 망라한 투쟁조직이 결성되어 군인양성사업을 논의, 추진하였고, 이러한 군사교육에 필요한 교재로서『체조요지』(1910. 9),『국민개병설』(1911. 4), 『군인수지』(1912. 6) 등을 출판하기도 하였다.14) 이러한 군인양성 사업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국민군단과 병학교의 창설 10) 김원용,『재미한인오십년사』, Reedley, California, 1959, pp.92~93, 95~96. 11) 소년병학교는 이후 약 5년간 독립군에 필요한 사관 양성기관으로서 존속하였다. 김원용, 위의 책, p.344. 12) 이 밖에도 멕시코 메리다 지방에서도 1909년부터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군인양성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11월 사관양성기관인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1913년 3월까지 운영되 었다. 참고로 당시 미주와 하와이에는 대한제국군 출신이 500여 명, 멕시코에는 200여 명 이 있었다고 한다. 김원용, 위의 책, pp.342~345. 13) 김원용, 위의 책, p.288. 14) 김원용, 위의 책, pp.274~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