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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230 군사연구 제127집 도다...(중략)근일에 일본사람들이 또 미국사람에게 엄습하여 치는 것을 당하였 고 일본사람의 집이 파쇄하는 지경을 당하였으니 일본사람은 장차 어찌할고9) 이와 같이 미일전쟁설의 보도와 여러 미국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미국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도 엿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과의 갈등이 깊어져 전쟁 이 발발한다는 것은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기대는 대한제국이 쇠망해갈 무렵부터 시작되어 일제강 점기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 게 되자 한국인들은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에 근거하여 미국이 한 국을 도와야 할 의무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국권 상실기에 어디에서도 의지 할 곳 없었던 한국에게 미국은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셈이다. 2. 미주한인의 군인양성운동 한국인의 미주 이민은 1902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 이민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05년까지 7,200여 명이 하와이에 정착하게 되었고, 비슷한 무렵 멕시코 에도 1,300여 명의 노동자가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민자 대다수가 영세 농민들이 었으므로 이민 초기에는 자치 단체도 결성하지 못한 채 각자의 노동력으로 생계 만을 유지하는 실정이었으나 이후 윤병구ㆍ안창호ㆍ정한경ㆍ박용만 등의 민족 지 도자들에 의해 한인사회에 사회ㆍ문화 운동이 일어나고, 또한 항일 단체들이 생 겨나게 되었다. 미주 한인의 무력양성운동이 시작된 것은 1910년 국치를 전후로 한 시기였다. 국망이라는 현실에 대한 미주한인들의 분노와 애국심이 군인양성운 동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앞서 설명한 독립전쟁론이 독립운동계의 중심적인 독립운동방략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미주지역 군인양성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하와이에서였다. 1907년 9월 하와이제도의 24개 한인 단체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하와이 한인 전체를 망라하는 통일단체인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면서 국권회복운동 후원과 동포들의 안녕과 교육증진 등을 목표로 하였고, 이 중 주요 단체들이 모두 ‘무예장려’를 내 9)『대한매일신보』1907년 8월 15일 1면「일본과 미국의 관계」.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나온 국제관계에 대한 논설 가운데 미일관계의 빈도수는 중일관계 다음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 는데, 특이할 점은 국제관계를 다룬 논설의 대부분이 중립적인 태도에서 기술된 것에 비 하여 미일관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김덕모,「대한매일신보 논설 분석」,『대한매일신보 연구』, 커뮤니케이션스북스, 2004, pp.195~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