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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미주한인사회 226 군사연구 제127집 중에 미주한인이 바라본 전쟁에 대한 시각과 함께 전쟁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사 실들을 위주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전쟁이라는 사건은 한인의 독립운동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일제의 강점 이후 우리 민족의 국 권회복운동은 미국, 일본 등 세계정세의 변동과 전쟁의 발발을 전제로 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우선적으로 언급한 후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한인사회의 모습과 한인들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전쟁의 종결과 관련해서는 3․1운동의 배경이라는 점에서 본글에서 다루기에는 연구범위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간략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전쟁 기간 미주한인사회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본 글에서는『신한민보』와 기 존의 연구성과를 주로 이용하였다.2) 물론 4, 5년치에 해당하는 신문자료를 모두 읽고, 검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뿐 아니라 근거자료의 선택에 있어서 균형 을 잃을 우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의 미주한인사 회에 대해서는 그 의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과 군사사적인 측면에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 각되기에 비록 기초적인 단계이지만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신한민보』에 나온 관련기사 및 논설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일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3) 2)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주지역 한인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논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기를 전후로 있었던 미주지역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연구성과가 있 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미주지역의 특정 독립운동가나, 단체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고 그 초점은 주로 3·1운동을 전후한 무렵의 민족운동, 독립운동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 3) 1900년대 후반기에 이르면 미주지역을 비롯하여 연해주 등 한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여러 신문이 간행되었다. 이들 교포 신문은 국내에도 유입되어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 쳤다. 사전 검열을 받던 대부분의 국내 신문들과는 달리 교포신문의 경우 일본의 압력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주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선진화된 문화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인구 수가 월등히 많던 간도, 연해주보다 먼저 신문이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큰 영향을 미쳤다.『신한민보』는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에서 1905년부터 발 간했던『공립신보』를 1909년 2월부터 제목을 개정하여 발행한 것이었다.『공립신보』는 공 립협회의,『신한민보』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였기 때문에, 이들 신문은 작게는 미주 한인단체에 대한, 크게는 미주지역 한인사회와 국권회복운동에 대한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최기영, 「구한말『공립신보』ㆍ『신한민보』에 관한 일고찰」,『동아연구』 17, 서강대동아 연구소, 1989, pp.575~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