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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25 Ⅰ. 머 리 말 제1차 세계대전은 한국인이 직접 개입된 전쟁은 아니었지만 한국의 이해와 관 련이 있는 미국, 일본, 중국, 유럽 각국이 참가하였으며 전후 이어진 민족운동의 주요한 촉진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인 사회에 많은 영향을 준 국제적 사건 이었다. 특히, 이 시기 국내의 동포를 포함하여 해외 각지의 한인들의 삶은 거주 하는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독립운동이 해외로 확대되면서 1910년대 독립운동은 국제정세 의 변화와 더욱 관계가 깊어갔다. 1910년 국치를 전후하여 연해주, 서ㆍ북간도에 권업회 등 한인자치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그 기반 위에서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 톡에 이상설,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라는 독립군 통수부를 설치하 게 되었다. 그에 따라 미주에서는 박용만을 중심으로 국민군단이 결성되었다. 이 것은 해외 독립군기지가 개척된 후에 1차적으로 시도한 독립군의 연합 또는 통할 체제였으나 그 일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도 전에 1914년 8월 세계대전이 발발함 으로써 러시아와 중국정부의 독립군단체들은 해 정부들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근거로 한 권업회 등이 해체되고 대한광복군정부의 계획도 자 연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17년은 한인들에게 또 한번의 고비 였다. 이해 봄에 러시아에서는 2월혁명이 있었고 특히, 미국과 중국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면서 독립운동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했기 때문이다.1) 이러한 국제정세 및 민족운동의 흐름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미주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인이 적대시하는 일본이 전쟁 초기부터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1917년 4월부터는 그들의 거주국가인 미국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일본이 속한 연합군의 대열에 참가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 미주지역 한 인사회를 살펴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미국의 참전 이전까지 미주지역은 국내, 러시아, 중국에 있던 한인들에 비해 비교적 언론 활동이 활발할 수 있었기에 당시 한국민의 시각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었다는 사 실도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 글에서는 독립운동의 측면보다는 전시의 미주한인사회에서 볼 수 있는 시대 적인 분위기를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따라서 전쟁기간(1914~1918) 1) 윤병석 외,『한민족의 독립운동사』,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0, pp.213~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