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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220 군사연구 제127집 석축이 이마쓰에서 카시라(香椎)에 이르기까지 높이 3m로 14km에 걸쳐 쌓여져 있는 것이다. 연합군은 시카노지마(志賀島)에서 능고도(能古島)에 이르는 돌울타리를 보고 다 른 상륙지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밤이 되었다. 일본군은 야음을 틈 타 이 일대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소규모 기습으로 연합군에게 약 간의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6월 7일 이후로 이 일대에서 소규모의 접전은 계 속되었다. 시카노지마는 후쿠오카시 동북쪽에 있는 주위 약 12km의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에도(강호)시대인 1784년에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 금인(金印)이 발 견되었던 곳으로 고대 신공황후와 관련된 신화가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동로 군은 일본군의 저항 속에서도 마침내 시카노지마에 상륙하였다. 이곳에서의 전투 는 6월 8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승부를 결할만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 6월 9일에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도 있었고, 동로군의 공격도 되풀이 되었다. 고려 측의 기록에는 고려가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상당한 접전이었던 것만은 분 명하다. 그러나 동로군은 6월 13일이 되자 시카노지마에 상륙했던 병력을 철수시켜 다 시 잇키로 향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절박했던 이유는 6월의 더위로 전염병이 생겨 재정비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사 망자가 전사자가 1천명인데 비해, 병사자가 3천인이었다는 사실은 전염병이 그만 큼 심각했었다는 의미이다. 동로군이 잇키로 돌아간 시기는 18일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동로군은 일 본군과의 전투에서 상륙에 실패를 했고, 또 병도 돌아서 사기가 상당히 저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로군 내부에서는 귀환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김방경(金方慶)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김방경은 식량이 한달분 가량 남아 있으므로 잇키에서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려 최초의 계획대로 대공격을 하자는 것이었다. 한편 동로군이 잇키에서 강남군을 기다리는 동안 일본군의 간헐적인 공격이 계 속되었다. 일본군의 공격이 원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로군은 7월에 들어서면 잇키에서 철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히젠의 다카시마로 향하였다. 아마도 이 무렵 강남군과 동로군 사이에 통신이 취해져 히라도에서 강남군과 만나기 위한 출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강남군은 사령관의 갑작스런 교체로 예정된 일자에 출발하지 못하고,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