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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19 에는 이러한 지명이 없다고 한다. 이 지역에 대해서는 대마의 동해안에 상현군 봉정 사하(上縣郡峰町佐賀)의 대명신포(大明神浦), 서쪽의 인전만(仁田灣)의 다지 류(志多留)나 하도(下島)의 뢰포(瀨浦) 등지로 비정되고 있다. 대마를 점령한 연합군은 바로 출발하여 잇키로 향하였다. 연합군이 상륙한 곳 은 가사모도(風本, 勝本)였다. 그 일시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마에서 잇키로 향하 여 가던 도중 폭풍우에 130명의 장병과 36명의 수부(水夫)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고 한다. 당시 잇키에는 진서봉행 쇼니 가게스케(少貳經資)의 둘째 아들 쇼니 스케도키 (少貳資時)가 뢰호포(瀨戶浦)의 높은 곳에 있는 선익성(船匿城)에 있었다고 한다. 최전선에 있었던 자시는 분전 중 전사하였다. 아직 20세가 되지 않은 나이였다. 잇키의 상기촌 뢰호포에 묘지가 있고, 아시베초(芦辺町) 뢰호(瀨戶)의 잇키신사에 모시는 등 일본에서는 굉장한 존경을 받고 있다. 동로군의 잇키 공격일시에 관해서는 5월 21일이라는 설이 있고, 며칠 뒤라는 설도 있어서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만약 같은 날 공격하였다면, 동로군은 2대로 나누어 행동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동로군은 900척 가운데 300척을 나누어 종 상충(宗像沖)에서 나카도노구니(長門國)로 향하게 하고, 다른 함대는 하카타로 향 하게 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연합군은 하카타와 장문국 양쪽 방향으로 공격하 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시 나카도노구니에는 호소 토키무네의 동생 호소 무네요리(北條宗賴)가 슈고 로 부임하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지역에서 고케닌(御家人)들을 연안으로 경비시 켜 방어를 철저히 하여 연합군은 상륙하지 못하고 하카타로 향하였다. 한편 가마쿠라 막부는 연합군이 1차 정벌에 실패하여 돌아가긴 했지만, 언제 있을지 모를 연합군의 재정벌에 대비하여 두었다. 그것이 큐슈 해안 일대에 설치 한 돌울타리(石垣)이다. 이러한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큐슈 북부 하카타만 일 대에 6월 6일부터 연합군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본래대로라면 연합함대의 대선단 이 나타나야 했겠지만, 양군의 작전시간이 맞질 않아서 동로군의 단독 공격이 되 었다. 예정대로였다면 4,400척 이상에 달하는 함대와 14만명 이상의 병력이 일시 에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에 차질이 생겨 연합군은 집중된 공격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일본의 방어태세도 1차때와는 달랐다. 진서봉행인 쇼니 가케스케, 오오토모 요리 야스 등의 지휘하에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돌울타리라고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