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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218 군사연구 제127집 Ⅲ. 제2차 여원연합군의 기동로 및 전투지역 연합군의 2차 정벌이 계획되었다.17) 2차 연합군은 규모와 작전면에서 1차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동로군이 900척에 4만 2천명, 강남군은 3천 5백척에 10만명이 었다. 이들은 잇키섬에서 만나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동로군은 1281년 5월에 3일에 고려의 합포(마산)를 출발하여 거제도 로 향했다.18) 동로군은 이곳에서 약 반달 가량을 체류했다. 이번 2차 정벌은 중 국 경원(慶元, 寧波)을 출발하는 강남군과 양면작전을 펴기 위함이다. 동로군은 거제도에서 중국군(강남군)의 정보를 듣고 출발하려는 것이었다. 양군은 고려에서 대한해협을 남하하고, 다른 쪽은 중국에서 동지나해를 북상 하여 6월 15일 전후에 일본의 잇키섬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동로군은 반달 가량을 거제도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강남군에게 있어서 커다란 변수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강남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된 우 승상(右丞相) 아라한(阿刺罕)이 급한 병에 걸려 사령관을 교체하지 않으면 안되 었던 것이다. 총사령관이 교체된 시기는 6월 26일로 새로이 사령관에 발탁된 인물은 몽골인 아탑해(阿塔海)였다. 지휘관은 범문호(范文虎)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돌발사 건으로 강남군의 출발은 늦어졌다. 그리하여 그보다 강남군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는 히라도(平戶)로 합류지점을 변경하였다. 강남군은 50대의 함대를 보내어 동 로군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 50대의 함대의 행로가 달라져 동로군은 합포를 출발 할 때는 강남군의 돌발사태를 알지 못하고 있었고, 양군이 다시 연락이 된 것은 6월 하순이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동로군이 거제도에서 반달 가량을 그냥 보내고 대마를 공격한 것은 5월 21일이었다.19) 이때 대마에 상륙한 부대는 고려군이었고, 상륙 지점은 ‘일본세계촌대명포(日本世界村大明浦)’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대마도 17) 여원연합군의 1차 침입이 끝난 뒤 몽고에서는 고려를 통하거나 직접 일본과의 통교를 요 구하였으나, 일본의 강경책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연구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본고에서는 군사적 기동 에 있어서의 이동경로를 확인하고자 하는 작업에 충실하고자 한다. 18)『고려사』충렬왕 7년 5월 무술. 19)『皇代略記』홍안4년 5월 21일 ; 『고려사절요』충렬왕 7년 5월. 「弘安四年日記抄」홍안 4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