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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216 군사연구 제127집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에 대한 해석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가 ‘가미 가제’라고 부르는 바람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 한 후쿠오카 기상대장출신의 주장은 큐슈 일대에 겨울에는 강풍이 불지 않는 다 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폭풍이 원정실패의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14) 그러한 주 장에 따르면 결국 원정실패의 원인은 일본군의 성공적인 방어전략에서 찾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감중기(勘中記)』15)에는 역풍(逆風)이 불어 배들이 뒤집혔다는 기록이 있고, 그 밖의 다른 기록에서도 그날의 일기가 순탄치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기록들은 여럿 있다. 동국통감에도 큰 바람이 불어 전함 등이 패하였고, 김 신(金侁)이 익사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폭풍과 관련이 없 는 것처럼 서술된 문헌도 있다. 나라 서대사(西大寺)의 사원상인(思圓上人)에게 「금강불자예존위신학생기(金剛佛子叡存威身學生記)」라는 자전(自傳)이 있는데, 그 글 가운데에 ‘10월 5일에 몽고인이 대마에 도착, 20일에 하카타에 도착, 바로 퇴산하였다.’라고 한 내용으로 보면 폭풍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거기팔번 궁의 『팔번우동훈(八幡愚童訓)』에도 폭풍에 관한 언급은 없다. 고려의 기록에는 1만 3천 5백인이 죽었다고 했는데, 왜 폭풍에 대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일까? 그런데 주목할만한 기록이 사원상인의 다른 기록에 있다. 그 내용은 ‘11월 5일 밤, 심한 바람이 불어 몽고의 대서 백여척이 침몰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는 심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지만, 그 날짜가 11월 5일로 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는 점은 있지만, 연합군은 10월 20일 밤이 아 닌 11월 5일 귀로 도중 잇키나 쓰시마의 해상에서 폭풍을 맞았을 가능성도 있다 는 주장도 있다. 이와 같이 연합군의 일본정벌은 그 기동로나 전투의 시간, 특히 원정실패의 원 인에 대하여 서로 다른 주장 등이 제기되고 있다.16) 그것은 어떻든 연합군의 기 동로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합포에서 쓰시마를 거쳐 잇키섬, 그리고 희젠 을 거쳐 하카다로 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연합군은 쓰시마와 잇키를 점령하 14) 장동익, 152쪽 참조. 15) 당시 쿄토에 살았던 公家의 일기를 일컬음. 16) 특히 원정실패의 원인에 대해서는 폭풍이 아니라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서라는 제기는 지 나친 일본 국수주의적 사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