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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15 맞고 중상을 입고 철퇴하였다. 그리고 히고(肥後)의 키쿠치(菊池武房),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 등이 분전을 하였다. 그 밖에도 단기(單騎)로 연합군이 점령 한 소하라의 사령부로 돌격해 온 무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다.12) 그리하여 하 카타를 버리고 그 남쪽에 있는 수성(水城)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수성은 백촌강전 투13)의 패전 이후에 신라와 당의 보복을 예상하고 다자이후를 방위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그러나 수성은 성이라기보다 방어용의 커다란 제방(堤防)이다. 동 서십정(東西十丁)에 이르는 제방으로 중앙에 수문을 만들어 위급할 때는 수문을 열어 하카타 일대를 물로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13세기 후반에는 그다지 성으로서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떻든 연합군 과 일본군은 수성을 공격·방어하는 양상으로 전황이 바뀌어갔다. 일본군은 10월 20일 수성으로 총퇴각을 하였다. 어떻든 하룻만의 전투로 일본 군은 큐슈 북부의 하카타만 일대를 연합군의 수중에 넘겨주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날 저녁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람도 점차 강해져 갔다. 이 무렵 연합군의 진영내에서는 전투의 진행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더욱이 연합군은 자신들의 점령지인 소하라고지에 일본군의 역습에 대비하면서, 주변부의 방어를 강화하지 않고 있었다. 연합군 진영의 의견 대립은 고려군 장군 김방경과 몽골군과의 사이에서 발생했다. 김방경은 계속 공격하여 큐슈 전토를 정복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원군은 좌부원수 유복형이 중상을 입은 것이 원 인이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전투를 통해 얻은 지역을 버리고 전군이 바다에 인양되어 있는 배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21일에 놀랄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하카타만을 뒤덮고 있었던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지난날 밤에 있었던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이 사실이 바로 ‘가미가제(神風)’사건이다. 이 기묘한 사실에 12) 일본에는 ‘무쿠리ㆍ고쿠리’라고 하는 용어가 있다. 무쿠리는 몽고, 고쿠리는 고려를 가르 킨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의 침공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들의 잔학상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에서는 ‘비참하다’라는 뜻의 형용사가 ‘무고이’인데, 그 유래가 무쿠리 의 무와 고쿠리의 고를 합친 것이라고 하여 이때의 침공에 대한 기억을 역사적으로 강조 하고 있다. 13) 663년 지금의 錦江 河口에서 벌어졌던 일본과 신라·당연합군과의 수군전투이다. 이 전투 에서 일본은 당군에게 완패하였다. 한국사에서는 백제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는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