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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연합군의 일본원정 경로에 대한 고찰 214 군사연구 제127집 진격하였다. 그리고 연합군은 실견천의 하구(河口) 부근에서 집결하였는데, 이를 본 일본군은 백도(百島) 부근 해안 일대에 병사들을 배치하고, 현재의 후쿠오카 (福岡)시 서구 소하라(祖原)로 본진을 옮겼다. 그리하여 양군은 소하라 고지를 두 고 일대 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연합군의 전술 에 크게 당황하여 전열이 흐트러지게 되었다. 연합군의 북, 동라, 함성 등의 소리 에 일본의 기병들이 탄 말들이 놀라서 일본진영에서는 말의 폭주를 막는 것이 더 급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연합군의 무기로 일본군이 크게 놀란 것은 철포(鐵砲)와 궁시(弓矢)였다. 철포 는 진천뢰(震天雷)라고 불리는 중국의 병기였는데, 깡통에 화약을 넣고 투척기로 발사하여 폭발시키는 무기였다. 실효성 있는 무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커다란 위 협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궁시는 일본에서 사용되었던 장궁이 아니라 단궁으로 말 위에서 빠른 속도로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거리도 짧고 길이도 짧았지 만 화살촉에 독을 발라 맞으면 치명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 한 연합군의 주력은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연합군의 편선인 고 려군과 몽한군이 모두 보병화가 진행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한편으로는 기병보다 보병을 주력화한 까닭은 전장에서 사용될 많은 말을 해상으로 수송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은 연합군의 집단전법에 압도되어 후퇴를 거듭할 수밖 에 없었다. 미침내 일본군은 모모치바라, 소하라고지의 본진도 마침내 철수를 하 였다. 연합군은 지금의 후쿠오카시 서구(西區) 방면에서 중앙구의 일부까지 점령 하였다. 일본은 당시 연합군을 가볍게 보고 피난도 가지 않고, 가재도구를 옮기지 도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막강한 전력의 연합군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을 것임은 당연하다. 한편 연합군은 하카타의 동부인 하코자키(箱崎)방면으로도 진출하였다. 여기에 는 오오토모가(大友家)와 하코자키하치만쿠(筥崎八幡宮)의 신관(神官)과 승병(僧 兵)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부와 마찬가지의 전황이 전개되었다. 일 본군은 이곳의 전투에서 참패하였고, 하치만쿠는 불로 소실되어 재가 되어 버렸 다. 이곳을 수비하던 대우뢰태(大友賴泰)의 군사들이 조기에 패전함으로써 신관들 은 어신체(御神体)를 맨손으로 쥐고 달아날 정도로 황급한 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이경자(少貳景資) 군대와 전투를 벌였던 연합군의 원군(元軍) 좌부원수(左副元帥) 유복형(劉復亨)이 화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