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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13 제압되어 모모치바라(百道原)로 퇴각하였던 것 같다.11) 밤이 되면서 연합군의 후속 군선들이 희젠 다카시마 일대에서 차례로 능고도 (能古島)와 묘견갑(妙見岬) 사이의 해협을 지나 하카타만으로 나아갔다. 연합군의 총공격은 10월 20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큐슈(九州) 일대에서 모인 고께닌(御家人)들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 수는 5천에서 많아야 1만인 정도 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쓰시마와 잇키에서 일본군의 패전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었다. 당시 다자이후 슈고쇼(守護所)의 쇼니 스케요시(少貳經資)는 이러한 소식 을 가마쿠라(鎌倉)막부에 알리고 큐슈 전 지역에도 알렸으나, 당시의 교통사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축후천(筑後川)의 홍수로 다리가 끊겨 군사들의 전진 속도에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의 사령관은 소이경자(少貳景資, 少貳經資의 동생)로 하였다. 소이경자는 하코자키(箱崎)에 본진을 배치하고, 연합군과의 전선을 이룬 이마쓰와 아카사카 (赤坡)에는 별동대를 두었다. 일본의 방어군들은 큐슈의 유력자인 오토모(大友), 키쿠치(菊池), 시마쓰(島津) 등이 소이경자의 지휘아래 전투 준비를 하였다. 이러 한 사정도 가마쿠라 막부에 알려졌고, 막부에서는 강한 지휘권을 가진 지휘관을 보내고자 하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호소 토키무네(北條時宗)씨가 장악하고 있었 고, 큐슈(九州)는 소이와 대우 양씨가 진서봉행(鎭西奉行)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실권은 없었다. 그리하여 막부에서는 진서탐제(鎭西探題)라는 직역을 만들어 호소 사네마사(北條實政)를 하카타로 보냈다. 연합군은 20일 이른 아침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대마와 잇키 공격은 서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연합군의 목표는 다자이후였던 것이다. 일본군은 자신 들과는 다른 형태의 공격을 취해 오는 연합군에 의하여 처음부터 당혹감을 감추 지 못했다. 일본군은 전투를 하기 전에 자신을 소개하고 선전을 포고하는 명적 (鳴鏑)을 날린 후 무사와 무사들끼리 겨루는 전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합군 은 그러한 절차가 없이 바로 집단으로 공격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큰 북을 울 리고, 동라(銅鑼)를 두드리며 함성을 크게 지르며 달려오니 그 소리가 천지를 울 릴만 하여 전장 공포심을 크게 유발시켰던 것이다. 경질선(輕疾船)에 분승한 병사 들은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아 댔고, 투척기로 화약무기를 날리기도 하였다. 이마쓰 부근에 대기하고 있던 연합군의 홍다구(洪茶丘) 부대는 모모치바라로 11) 전황으로 보아서는 이 설이 맞을 것 같으나, 이 전투에 관한 확실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백석일랑, 앞의 책, NHK출판, 2001, 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