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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사사및기타 군사연구 제127집 211 연합군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산파도(山坡道)를 넘어 좌수포로 떠나고 있다. 그리고 대마도에서는 밤이 되자 통역 1인을 데리고 연합군의 선박에 다가갔으 나, 연합군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화살만 쏘아대어 접촉은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합군 1천여 명이 배를 타고 차례로 상륙을 하 였다. 결국 사스노우라에서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쓰시마의 수비병은 고작 80명 정도였다고 한다. 쓰시마에서의 전투는 대장인 종 조국을 비롯하여 전부 전사함으로써 끝이 났다.9) 연합군이 쓰시마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대략 10일 전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연합군이 왜 이런 기간 동안 쓰시마에 머물렀어야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 유는 모른다. 그리고 연합군이 쓰시마를 공격하였다는 사실이 하카타(박다)에 전 해진 시기는 10월 13일이었다. 그런데 연합군이 잇키(壹岐)에 도달한 때는 10월 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그러므로 하카타의 다자이후에서 연합군의 공격을 알았 다고 하더라도 지원군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잇키섬에서 연합군의 상륙장소는 가쓰모도(勝本)에서 유노모도(湯ノ本)에 이르 는 곳이었다. 잇키(壹岐)에서는 쓰시마에서 보낸 소태랑(小太郞), 병위차랑(兵衛次 郞)의 보고로 연합군의 공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 소식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전투 능력을 가진 자들은 슈고다이 평경륭(平景隆)을 비롯하여 백여기 정도 밖에 없었다. 잇키의 남자들을 전부 모은다고 해도 3만의 연합군에게 대적하기에 는 무리였다. 잇키에서의 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가쓰모도에 상륙하였다는 소식 을 들은 평경륭은 신성촌(新城村)의 통힐성(樋詰城)에서 백기(騎)의 무리를 이끌 고 전투에 임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대선(大船) 2척에서 400명만 상륙을 시켰던 상황이었다. 양군이 맞닥뜨린 곳은 장삼랑(庄三郞)이라는 사람의 성(城) 앞이었다. 성이라기보다 관(館)과 같은 곳이었다. 평경륭과 그의 무리는 선전하였지만, 중과 부적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야음을 틈 타 통힐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통힐성은 본 환(本丸)이 동서 18간, 남북이 14간이며, 굴(堀) 주위가 65간, 깊이 7척 7촌인 작 은 성채이다. 그리하여 잇키의 남은 무사들과 도민들이 싸웠으나,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사상자만 증가하였다. 잇키에서도 쓰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자이후가 있는 하카타(博多)로 사신을 급학 보냈지만, 원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9) 10월 13일 대마도에서의 패전이 하카타에 전해짐.(『감중기』, 문영 11년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