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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갑주의 특성과 유성룡 갑주 184 군사연구 제127집 Ⅲ. 유성룡 갑주 1. 유성룡의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 성에서 출생하였다.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황해도관찰사 유중녕(柳仲濘)의 아 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이황의 문인을 김성일과 동문수 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 생원ㆍ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 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ㆍ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ㆍ지제교로 경연검토관ㆍ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 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ㆍ병조좌랑ㆍ이조좌랑ㆍ부 교리ㆍ이조정랑ㆍ교리ㆍ전한ㆍ장령ㆍ부응교ㆍ검상ㆍ사인ㆍ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ㆍ동부승지ㆍ지제교로 경연참찬관ㆍ춘추관 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 간ㆍ우부승지ㆍ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황화집서(皇華 集序)>를 찬진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 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 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 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ㆍ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 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ㆍ병조판서ㆍ지중추부사를 역임 하고 왕명을 받아〈효경대의발(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를 올려 자핵(自劾)하였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 院君)에 봉하여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죽게 된 최영경을 구제 하려는 소를 초안하였으나 올리지 못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