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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35 정규군 6만여 명과 준군사부대 10만여 명이 있었지만 장비와 훈련이 미흡한 정규군 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결전을 위해 산악지대에서 훈련시켰다. 그리고 준군사 부대를 활용해 사회혼란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점이 다가오 자 디엔비엔푸에서의 결전을 감행했다. 디엔비엔푸의 전투는 프랑스군이 유도한 작전이었지만 그 전투는 인민전쟁의 3단계를 위한 결전(決戰)이 되었다. Ⅲ. 디엔비엔푸 전투와 케산 전투 1. 디엔비엔푸 전투 호치민군과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군은 우수한 장비와 조직으로 계속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호치민군은 프랑스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대로 대피하 였다. 은거한 호치민은 전쟁의 장기화를 위해 산악지대 거점에 각종 공장을 세우 고 군수품과 생필품을 생산했다. 프랑스군은 1947년 10월 기계화 부대를 북부산 악지대에 투입시켜 은거하고 있는 호치민군의 거점을 소탕하는 ‘레아(Lea)’작전을 감행했다. 산악지역은 깊게 진입할수록 기계화 부대가 기동할 수 있는 도로는 제 한되었고 게릴라에 의해 피해를 입기 쉬웠다. 결국 산악지역에 투입된 프랑스군 은 적을 찾지 못하고 보급로의 차단과 게릴라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었다. 산악지역에서 어느 정도 군사력을 회복한 호치민군은 1950년 800여명의 프랑스 군이 주둔한 북동쪽 중국 국경 근처의 동케(Dong Khe)에 대한 주간공격을 감행 해 3일 만에 점령하였다. 그 후 동케 북쪽에 고립된 까오방의 프랑스군까지 공격 하여 장악함으로써 베트남 북쪽의 산악지대는 호치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처럼 산악전투에서 계속 승리한 호치민군은 자신감이 생겨 계속해서 빈엔(Vinh Yen), 마오케(Mao Khe), 닌빈(ninh Bin) 지역을 공격하였지만 대패하였다.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1953년 5월,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이 프랑스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나바르 장군은 1953년 10월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남부지역의 푸노꽌(Phu Nho Quan)이라는 공산 주의자들의 본거지를 장악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베트민이 푸노꽌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얻은 것이 없게 되었다. 이처럼 베트남인민군을 제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좌절한 나바르 장군은 호치민군을 유인할 수 있는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