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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9 하여 그동안 부대정비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국 군과 유엔군이 1월 25일부터 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자, 중공군의 지 휘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에 중공군은 황급히 전략을 수정하여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하면서 서울 방어를 위해 한강선에서 강력히 방어한다”는 견수방어(堅守防 禦) 방침을 수립하였다. 또한 중동부에서는 “유엔군 1~2개 사단을 유인하여 섬 멸한다”는 유인격멸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서부지역에 중공군 2개 군(군 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하고, 중동부 지역에 중공군 4개 군(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하며, 예비 병력으로 원산의 제9병단 예하 제26군(군단)을 조기에 이동하여 철원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철저히 전투준비를 하지 못한 중공군은 유 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다. 3. 제3단계 : 라운드 업(Round Up)작전으로 중동부전선에서 반격 1951년 1월 말에 서부지역에서 한강을 향하여 공격하는 썬더볼트작전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전선이 북쪽으로 추진됨에 따라 중동부지역도 서부지역과 전 선을 유지하기 위해 전선을 북상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때 리지웨이 장군은 보급 이 취약한 중공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어 반격하기로 결심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서부전선은 한강이 가로막고 있어 피아 공격이 어려운 반면, 중동부지역에서는 전선을 북상시켜 홍천 일대에서 중공군의 주력을 섬멸하여 서 울을 동쪽 원거리에서 포위한다면 서울 탈환에 보다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 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리지웨이 장군은 중부지역의 미 제10군단으로 하여 금 적극적인 공세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조․중 연합군사령관 펑떠화이는 1951년 1월 말경 서부지역에서의 유엔군 반격을 한강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하고 주력을 중부전선에 집결시켜 홍천 및 횡성 일대에서 유엔군 1~2개 사단을 격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홍천 포위를 계획하고 있는 유엔군과 횡성 진출을 기도하고 있는 공산군은 중부전선에서 일전 이 불가피하였다. 미 제10군단은 당시 여주-평창을 연하는 선에서 제8군의 공격 명령을 접수하자, 서부지역에서의 반격작전 방식을 적용하여 위력수색을 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