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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7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각 군단에서 1개 사단만을 전방에 운용하는 전투정찰 방 침을 바꿔 1월 31일부터는 각 군단의 주력을 전방에 투입하여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이 공격으로 전환하여 수원 - 신갈을 연하는 선에 진출하자, 앞으로 한강을 향해 계속 진출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수리산과 관악산이었다. 첫째, 수리산 점령을 위하여, 제8군의 서측 공격부대인 미 제25사단은 1월 27일에 수리산 하단의 안산-군포를 연하는 선에 도달하여 1월 31일 아침에 수리산의 서 측 능선을 터키여단이, 동측 능선을 제35연대가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한편 수 리산을 방어하는 중공군은 제150사단 예하의 1개 연대 규모였다. 이들은 수리산 정상인 475고지와 인접의 440고지를 중심으로 엄체호를 구축하였다. 미군은 2월 2일 수리산 정상 475고지를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은 야간에 터키여단이 점령하지 못한 440고지 방향에서 역습을 한 차례 실시한 후 공격을 멈추고 도주하였다. 둘째, 관악산 점령을 위하여,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가 2월 9일 과천방향에서 관악산을 공격하자, 중공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였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10:00경에 관악산을 점령하고 2월 10일에 영등포 - 노량진 선으로 진출하여 가장 먼저 한강선에 도착한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후 1개월 만에 다시 한강 남쪽에서 서울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림 2> 국군과 유엔군의 썬더볼트작전(1951년 1월 31일~2월 10일)11) 11) 육군대학「한국전쟁사(하)」, 교참 7-0-12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