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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5 이에 리지웨이 장군은 정찰부대의 규모를 확대하여 증강된 1개 연대 규모 병력 으로 위력수색을 하여 중공군의 배치, 규모, 장차의 기도 등을 파악하기로 하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하였다. 제1군단에서는 예하의 제25사단 제27연대를 위력 수색부대로 선정한 후, 연대에 전차 1개 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배속시키고 작전의 명칭을 제27연대의 부대명칭인 울프하운드(Wolfhound)라고 명명하였다. 제27연대는 1월 15일 아침에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 - 오산을 연결하는 1번 도로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공격하였다. 연대가 오산을 경유하여 16일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한편 군단장은 수원을 공격하는 제27연대의 동측방을 방호하기 위하여 미 제3 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 방향으로 진출시켜 수 원-용인 간의 42번 도로를 차단하였다. 이들 역시 초기에는 적의 저항을 받지 않 고 순조롭게 진출할 수 있었으나 수원에 근접하면서부터 600~800여 명으로 추산 되는 중공군이 강력히 저항하여 공격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군단장은 최초 계획 한 위력수색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1월 16일 14:00경에 공격부대를 철수하였다.8) 이 작전은 전술적, 작전적, 전략적 차원에서 그 효과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전술적 차원에서 유엔군은 그 당시 중공군의 방어선이 수원 - 이천을 연하는 선이며,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한 점과 중공군이 가까운 시일에 대규 모의 공세를 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작전적 차원에서 유엔군은 전장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장차작전에 유리 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부대 규모는 소규모 단위인 연대규모의 부대로도 가능 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 작전의 효과는 유엔군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철군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즉, 당시 미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이 1월 15일 전선을 시찰하였다. 시찰의 목적은 철군과 관련된 미국 의 정책을 전선사령관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린스 대장이 방문한 동일한 날짜에 실시한 울프하운드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1월 17일 콜린스 대장은 리지웨이 중장으로부터 “중공군의 주력은 아직까지 한강 이남으로 8) 국방군사연구소(채한국 외 2인),「한국전쟁사(중)」, 국방군사연구소, 1996, pp.361~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