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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3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3군단도 공격을 받고 있었으므로 중공군에게 포위될 위험이 있었다. 결국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1월 1일 12:00경 전 부대를 한강 - 양평 - 홍천선으로, 1월 3일 오후에는 한강선에서 평택-안성선으로 철수시켰다.4) 그리고 15:00경에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림 1> 중공군 제3차 공세(1950년 12월 30일~1951년 1월 7일)5) 2. 중부축선의 위기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평택-안성까지 후퇴하는 동안에 가평 - 춘천 지역에서는 중공군 2개 군(군단)이 국군 제2사단과 제5사단 지역을 돌파하 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격은 1월 8일을 전후하여 일제히 멈추었다.6) 한편, 홍천 - 원주 방향에서는 12월 중순에 북한군 2개 군단이 태백산맥을 따라 국군 제8사단과 제3사단의 후방으로 침투하여 방어중인 국군 부대들을 격파한 후 원주 - 평창과 영월-단양 일대까지 진출하여 제8군의 후방 병참선을 위협하였다. 4) 리지웨이 장군이 한강선에서 결전을 포기한 것은 한강이 결빙되어 장애물로써 가치가 반감 되었기 때문이었다. 5) 육군대학『한국전쟁사(하)』교참 7-0-12. 2004. p.234. 6) 최용호, “중공군 제3차 공세와 1․4후퇴, 그리고 원주”, 국방저널 2003년 3월호, pp.58~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