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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25전쟁시 유엔군의 반격 효과분석 112 군사연구 제127집 【표 1】 중공군 공세 현황 구 분 기 간 내 용 제1차 공 세 1950. 10. 25~11. 4 •운산(1사단), 온정리(6사단)공격, 청천강선 진출 제2차 공 세 1950. 11. 25~12. 4 •덕천~영원선의 국군 제2군단 공격, 덕천~맹산일대 진출 제3차 공 세 1950. 12. 31~1951. 1. 8 •서울 점령, 수원 진출 Ⅱ.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조․중 연합사령관3) 펑떠화이(彭德懷)는 제2차 공세로 인한 손실된 병력과 장비 등을 보충, 정비하고 새로운 증원부대(제19병단)의 도착 등을 고려하여 “1951년 2월~3월경에 38도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은 펑떠화이에게 “중공군이 공격을 하지 않을 경우에 38도선이 고착화된다”는 정치적 문제를 고려하여 지체 없이 38도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 령한 후에 부대를 정비하기로 하고 즉각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중공군 은 12월 31일 전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여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1. 서부축선의 위기 중공군 제3차 공세시 중공군의 기동계획은 전쟁초기 북한군의 기동계획과 비슷 하였다. 즉 중공군은 주공을 5개 군단(중공군 4개 군단, 북한군 1개 군단)으로 편성하여 서울 북방에서 서울을 목표로 공격하고 2개의 조공을 편성하여 가평 - 서울 동측 방향으로 중공군 2개 군단이 공격하고, 홍천 - 원주 방향으로 북한군 2개 군단이 공격하는 등 총 9개 군단을 투입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31일 17:00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 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국군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국군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중공군 인해전술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1년 1월 1일 오전에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의 방어지역에 돌파구가 형성되었고, 중동부전선에 3) 조․중연합사령부는 1950년 12월 중순경 창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