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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 쟁 사 군사연구 제127집 111 Ⅰ. 머 리 말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 선상에서 기습 남침하여 시작되었다. 그후 약 4개월이 지난 10월 21일부터는 공격의 주체가 북한군에서 중공군으로 바 뀌었다. 그 때부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유엔군은 10월 20일에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향해 진출할 때 중공군은 21일 에 평안북도 운산 및 온정리 일대에서 전개한 후 25일에는 운산의 국군 제1사단과 온정리의 국군 제6사단을 기습 공격하여 청천강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의 전투를 가리켜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제1차 공세’라고 한다.1) 또 중공군은 1개월 후인 11월 25일부터 제2차 공세를 감행하여 26일에는 덕천- 영원선에서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2군단 정면에 9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였다. 그 결과 국군 제2군단이 붕괴되었고, 중공군은 덕천과 맹산 일대로 진출하였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 중공군 제9병단(12개 사단)이 유담리에 도착한 미 제 10군단의 제1해병사단 선두부대를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유엔군은 11월 28일에 중공군의 참전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평양 - 원산을 연하는 선으로 전면적인 철수를 결정하였다.2)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 패배한 후, 비로 소 중공군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2차 공세 이후 중공군은 약 1개월 동안 병력을 보충하고 필요한 식량도 확보 하여 12월 31일 전 전선에서 제3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중공군은 1951년 1월 4일 또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유엔군은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37도선에서 전열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중공군의 공세현황은 다음 【표 1】에 제시되어 있다. 결국 미국은 중국에게 휴전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와 같이 중공군이 제1, 2, 3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유엔군은 단지 한차례 공세(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를 감행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였다. 그 러나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반격을 실시하여 효과 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종료되고 제4차 공세가 시작 되기 전까지 유엔군의 반격준비 단계인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의 효과와 그 이후에 실시한 유엔군의 제1차 반격인 서부전선에서의 썬더볼트(Thunderbolt)작 전과 중동부전선에서의 라운드 업(Round Up)작전의 효과를 밝히는 것이다. 1) 합동참모본부,「한국전사」, 1984, pp.466~479. 2) 한국전략문제연구소,「중공군의 한국전쟁사 : 항미원조전사」, 새경사, 1991, pp.4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