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page


95page

墓碑銘幷序 此 陜川郡西鳳基洞酉坐原 故拙堂先生朴公衣履之藏也 舊有樂石 毁于壬燹 後孫基德孝英尙台諸人 謀竪碑 請銘于愈 愈其鄕後生也 不敢辭 朴氏系出新羅王 密城大君 始受封爲貫 高麗太師諱彦孚 其中祖也 自後赫世文獻 至諱大和吏部尙書 諱幹貳相 諡良孝 諱英均版圖判書銀山府院君 諡文憲 寔公之高曾祖也 故 諱翊 號松隱 以理學 爲當世師宗 恭愍朝禮部侍郞兼中書令 我太祖 累徵不起 卒贈左議政諡忠肅 妣星山裵氏 貳相賢輔女 繼妃昌原朴氏 郞將忠敏女 又高興柳氏 判決事仁杞女 皆贈貞敬夫人 有四子 曰融曰昭曰調曰聰 聰卽公之諱也 公生 而潁悟絶人 旣長隨三兄 從學于圃隱鄭先生之門 大被師門獎詡 當時有四鳳之稱 所與交遊 如卞春亭季良 成獨谷石璘 以遺逸交薦 至除正郞 公不樂仕宦 未嘗淹于職 晩年自密陽移居于三嘉大坪里 蓋愛其地之僻也 三山崷崒 中有一小岡 踠蟺可樂 於是築小亭 以居生徒 取朱子詩玉蘊山含輝之義 名之曰玉山亭 至今老樹環立 公之子姓八人 嘗掛印于此故又謂之八印亭 載于邑誌 公 生于癸巳六月二十四日 卒于己未二月二日 享年八十七 特 贈吏曹參判 異數也 我 憲廟己亥 多士躋享于丹城之新溪院 配東萊鄭氏 墓失傳 後配江陽李氏 太子詹事公實女 江陽君若之孫 墓在公墓後 生二男二女 男長承文 陰正郞陞嘉善同中樞 次熙文縣監 女姜渭成 李碩柱訓導 中樞男士林蔭察訪 書林主簿 儒林習讀 女文敬忠 縣監男世林縣監 彦林判事 係林通贊 女金獻大提學 曾玄以下詳于家狀 嗚呼 公以累世閥閱 內承父兄之敎 外資師友之力 才高而質美 學博而行篤 苟以富貴 爲心則金門玉署 乃其分內而掉頭名利 終老林泉 嗚呼 圃隱死矣 雖欲仕 其誰依歸 此公所以扁堂以拙 不求聞於當世者歟 是爲之銘 銘曰 人皆巧蹌 我獨拙守 拙守維何 生之足已 君師一體 可仕可止 其跡隱微 孰會此意 我銘詔之 庶幾百世 鄕後學 盆城 許愈 謹撰
95page

송은선생 신도비명(2) 또 명하기를 요순(堯舜) 같은 임금으로 만들려는 뜻이 있었는데 재기(才器)가 그 일을 이룩하기에 족했고 이윤(伊尹) 부열(傅說) 같이 보필(輔弼)할 그릇이었는데 덕이 감당해 내기에 족하며 공자(孔子) 주자(朱子)를 잇달아서 후진(後進)을 개발(開發)할 뜻이 있었는데 문장(文章)이 그들을 흥기(興起) 시키기에 족했다. 그러나 하늘이 이분에게 큰 임무(任務)를 내리면서 그 시기(時期)를 주지 않았음에야 어찌하랴. 나라일이 다난(多難)하여 변경(邊境) 호적(胡賊)과 섬오랑캐를 잠간 정벌(征伐)하자 승첩(勝捷)을 아뢰어서 방가(邦家)의 벼리(維)로 되였다. 셋 조정(朝廷)에 힘을 다했고 외손으로 위태한 시국(時局)을 붙들었다. 큰 집이 장차 엎어지는데 좋은 장인(匠人)이건만 지탱(支撑)하기 어렵다. 무너지는 물결 기울어지는 모래 덤에도 물 가운데 섰는 기둥은 옮겨지지 않았다. 갓을 걸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사녀(士女)가 함께 탄식하였다. 산중에 세월(甲子)이 한가로와서 희(羲) 희(熙)가 꾸민 역서(歷書)도 없다.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시(詩) 짓기와 노래에 붙였다. 두가지 잠(箴)에 드리운 가르침은 주자의 뜻이고 공자의 사상(思想)이었다. 몸은 나타났으나 도(道) 궁(窮)함을 옛날 철인(哲人)이 슬퍼한 바다. 비록 궁하기는 했으나 아름다운 혜택(惠澤)을 후세에 베풀었다. 六경(經)이 몸에 있었는데 하늘에 올라 기성(箕星)을 탔다. 나에게 바른 법을 보여주니 백대의 스승이로다. 기산(箕山)이 높고 높고 송계(松溪)에 물 가득하다. 내가 높은 비석(碑石)에 명(銘)하여 기리 후세에 밝힌다. 가선대부 경연참찬관 원임 규장각 부제학(嘉善大夫經筵參贊官原任奎章閣副提學) 연안 이병관(延安 李炳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