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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隱先生墓碑銘(송은선생 묘비명) 지금 임금 헌종 3년 가을에 내가 지밀주사로 되었고, 주 남쪽에 고예부시랑 송은 박선생의 사당이 있었다. 선생은 곧 전조 두문동 여러 현인중에 한분인데, 매양 그의 기상과 지절을 상상해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의 진영을 우러러 보니 긴 수염과 신장이 열자인 것은 포은 정선생의 시와 같고 범의 눈썹 봉의 눈은 야은 길선생의 시와 같았다. 불그레한 얼굴과 반백 머리에 정신이 살아있는 듯하였다. 바라보면 엄숙하고 곁에 가면 온화하여 사람에게 창송 고죽의 느낌과 고산원수의 뜻이 있게 하였다. 대저 칠분 단청으로 그린 화상이 상전이 벽해로 되는 아득한 세월을 겪은 나머지에도 생생하고 늠늠하였다. 천년을 지냈건만 보는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머리털이 꼿꼿해지게 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물며 그의 평생 행적과 조정에 있을 때의 대개가 옥이 빛나고 구슬이 아름답듯 점점 나타나서 먼지도다. 비치는 해와 별같고 우주에 뻗힌 동량 같은 즉 또 이 사문의 후한 다행이 아니겠는가. 삼가 상고하니 선생의 휘는 익인데 처음 휘는 천익이고 자는 태시이다. 성은 박시로서 신라 밀성대군의 후손이다. 휘는 언부이고 고려때 시중이며 밀성군으로 봉호된 분이 있어 이분이 휘 효신을 낳았는데 중조의 문하시중 벼슬을 했고 시호는 문익이다. 이가 대장군 후 공필를 낳았고 이가 이부상서 휘 육경을 낳았다. 이가 이부상서 휘 대화를 낳았고 이분이 이상 휘 간을 낳았는데 선생의 왕고이다. 고의 휘는 영균 삼재였고 은산부원군으로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이다. 비는 능성구씨인데 좌정승 문정공 위의 따님이다. 충숙왕 임신년 7월 27일 밀성삽포리에서 선생을 낳았는데 기도가 거룩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공민왕때 과거에 올랐고 소감을 거처서 한원에 여러번 천거되었으며 예부시랑과 중서령으로 옮겼다. 지극한 성품이 있어 효하면서 우애하고 사랑하면서 공경하였다. 몸을 닦으면서 뜻을 세우는데에 잠이 있었고 남을 가르치면서 몸을 가지는데에 법규가 있었다. 고려왕실을 도와서 전벌하면 문득 공을 아뢰니 사람들이 장상의 재주를 겸전했음을 알렸다. 포은 야은과 도의 사귐을 했고 성리를 강론해서 멀리 하도낙서도 소구하였다. 야은이 선생의 화상에 찬하면서 「강상을 붙들어서 천재에 우뚝하다. 덕스러운 얼굴이고 이학의 으뜸이다.」 하였다. 고려국 운수가 끝나게 되자 선생은 아우 밀성군 천경과 더불어 기미를 보고 용감하게 물러 났다. 벼슬을 버리고 남쪽 시골로 돌아와서 스스로 송은이라 호했다. 휫파람 불고 시 읊퍼서 스스로 즐거워 하였다. 포은이 한가한 날에는 가끔 찾아와서 시국을 상심하며 심사를 얘기하였다. 또 이동은 재홍 홍만은 재이목은 색 이휴은 석주 김성은 대윤과 더불어 충의로 서로 사귐을 맺였는데 세상에서 팔은이라 일컬었다. 당시 여러 현인이 시를 지어 준 것이 여러편 이어서 혹은 「백세 종사에 염락과 추로라」 했고, 혹은 「충성된 혼은 솔의 절개이고 의로운 넋은 대의 마음이다.」 했으며, 혹은 「명절은 백이 숙제와 같고 심사는 기산 영수에 맑다.」 하였다. 황보공이 신도비문을 지었고 변춘정이 시장을 꾸몄으며 김삼족당이 유사를 써서 이미 다 말한 다음이니 다시 군말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대개 그가 먼저 율리의 송국을 읊프고 홀로 서산에 고비를 캤는데 어진 자손이 대마다 그 아름다움을 이룩하였다. 도덕과 절의로 착함을 쌓아 경사가 포개지니 하늘이 선생에게 보담함이 또한 훌륭하였다. 홍무 갑술년에 공조판서로 불렸고 또 형조·예조·이조·이조의 판서로 불렸으며, 병자년에는 좌상으로 불렀으나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두견시를 읊프면서 회포를 불렀는데 「높고 넓은 하늘 땅 길 잃은 사람 달지고 꽃도지고 적막한 생각」하는 글귀는 천고 지사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도록 하기에 족하다. 무인년 11월 27일 송계리 기산 아래에서 고종하였다. 전날밤에 목욕하고 손톱을 깍은 다음 자리를 정돈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네아들을 불러서 유서를 주며 「나는 왕씨의 혼령에게로 돌아 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다. 이미 남의 신하로 되거던 충성을 힘껏 하라. 선천 후천에 부자간의 시대가 다르다.」 하였다. 솔을 심어서 시내 이름으로 했음도 옛 도읍을 생각한 것이고 산을 기산이라 한 것은 소부 허유와 같은 지취였다. 도주 소고야 두덕에 장사하였다. 배 성주배씨는 이상 현보의 따님이고 후배 창원박씨는 보승랑장 충민의 따님이며, 후배 고흥유씨는 판결사 인기의 따님이다.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융은 문과에 올라 전한 벼슬을 했고 금산 함안 고을을 역임하여 청백하다는 것으로써 저명하였다. 여러 고을 향교와 제기를 수선했는데 탁영 김선생이 지은 학궁기에 「박선생 융이 이 도에 도사로 있으면서 크게 힘썼다.」 하였다. 호는 우당이다. 다음 조는 생원시에 합격했고 안음현감을 했는데 청백비가 있었다. 예학을 깊이 연구했고 스승에게 배움이 독실하여 야은·도은 여러 현인과 더불어 도의 사귐이 긴밀하였다. 호는 인당이다. 다음 조는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학을 깊이 연구해서 정미한데에까지 깊이 알았다. 효성스러웠다는 것 천거되어 예조정랑 벼슬까지 하였다. 호는 아당이다. 다음 총은 행실이 돈독했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부형의 훈계를 삼가 지켰다. 효성스러웠다는 것으로서 천거되 호조정랑까지 했고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는데, 호는 졸당이다. 따님은 군수 손혁 감찰 손억 생원 조공현에게로 출가했다. 전한은 아들이 둘이어서 진은 문과에 올라 전적을 했고 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건은 부사직이었는데 호는 소고이다. 현감은 아들이 셋이어서 맹번은 감찰이고 중번은 별시위이며 계번은 호군이었다. 정랑은 흥문·두문 두아들을 두었고 이조참판은 두아들인데 승문은 동지이고 희문은 현감이었다. 참판은 두아들이어서 문손은 진사시에 합격했고 통찬이었으며 다음은 승손이었다. 사직은 아들하나가 승원인데 충순위 부사직이고 호는 휴애이다. 감찰은 아들이 다섯이어서 계명·계언·계어·계손인데 계장은 직장이었다. 별시위는 한 아들 효순이 교수였고 호군도 아들 하나 수가 수위위였다. 흥문은 아들 셋인데 의손은 생원이고 다음은 예손과 신손이다. 두문은 두 아들이 덕림과 계창인데 계창은 진사였다. 동지는 세 아들이어서 사림은 찰방이고 서림은 생원이며 유림은 습독이었다. 현감도 아들 셋이 세림은 현감이고 언림은 만호이며 다음은 계림이었다. 통찬은 한 아들 성무가 이랑이었다. 이랑의 두째 아들 밀은 지평이고 지평은 아들이 여섯인데 숭인은 진사이고 숭의는 생원이며 숭례는 문과에 올랐다. 숭례는 한 아들 주가 문과에 올라 군수였고 효행으로 정문되었다. 숭순은 아들이 셋인데 하담이 생원시에 합격했고 행의로써 사평에 제수하여 세번을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호는 소요당이다. 김삼족당 대유·곽경재 순과 더불어 좋은 벗이었으며 선암서원에 향사한다. 하청은 예조정랑이었고 호는 성와이며 하증은 정언이고 호는 병재이다. 계명은 아들 셋이 철동·무근·수근인데, 수근은 문과에 올라 이조좌랑을 지냈다. 계언은 한 아들이 무성이고 직장도 한 아들 희수가 현감이었다. 교수도 한 아들 수견이 점필재 문인이었고, 3년을 시묘하였다. 효행으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호를 묘선재라 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효행에 감복하여 그곳 산천과 동리를 모두 묘선이라 부른다. 모선재의 한 아들 환이 현감이었고 현감의 한 아들 승륜은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참판은 아들이 둘인데 이겸은 임란때 원종한 공으로서 공조참의로 증직되었고 이눌도 임란때 원종한 공으로 가선품계로 승진되었다. 수의위의 외아들 생화는 통정이고 의손의 외아들 한은 현감이었다. 찰방의 한 아들 분은 사복시 정이고 사복시 정의 아들은 삼남인데 인슈는 부장이요 인성은 부장이요 인원은 통정이다. 인슈은 넷아들을 두웠는데 천정은 판관이고 천우는 진사로서 좌승지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팔정이다. 팔정의 외아들 창도는 원종 일등공신으로서 통정으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추탄이다. 서림은 아들이 셋인데 맏이는 번이고 다음 훤은 생원이며 진은 판결사로 증직되었다. 판결사는 두 아들을 두어서 원량은 진사이고 인량은 학행과 문장이 있었으며 원종공신으로서 가선 품계에 승진되었는데 호는 만수당이다. 습독은 네 아들이 영 안 빈 온이다. 세림은 아들이 셋인데 난은 주부이고 다음은 전 다음 훈은 참봉이다. 만호는 외아들 운이고 첨정도 외아들이 사충이다. 통정은 두아들이어서 서린 서귀인데 서귀는 교수이고 호가 악견이다. 소요당은 두 아들인데 영은 효행으로써 참봉에 제수되고 형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성효재이다. 다음 이는 장사랑이다. 성와는 외아들 옹이 참봉이었고 병재도 외아들 적이 효행으로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형조참판은 아들이 셋인데 경연은 참의로 증직되었고 경신은 선무 일등공신으로서 밀양부사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삼우제이다. 경인은 임진왜란에 창의했다가 순절하여 지평으로 증직되었고 호는 용연이다. 장사랑은 네 아들이 경전은 임란에 제일 먼저 창의해서 선무공으로 창녕현감에 제수되고 병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호는 제우당이다. 경윤은 첨정으로서 창의하여 선무공이 있었으며 병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호는 국헌이다. 경선은 만호였는데 창의했다가 순절하여 승지로 증직되었고 다음은 경준이다. 옹도 4형제를 두어서 경승은 장사랑이고 경생은 참봉이였으며 경서도 장사랑이고 경찬은 효행으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한강 선생의 문인이었다. 참의도 네아들인데 환은 참봉이고 찬은 우후이며 창의해서 선무공신으로 되었고 호는 운곡이다. 우도 임란에 창의했고 이괄의 역란에는 진무 일등공신으로서 남포현감에 제수되었으며 병자호란때에 쌍령에서 순절하여 호조참의로 증직되었는데 호는 기포이다. 숙은 봉사이고 선무공신이며 호는 용암이다. 규는 호조좌랑으로 증직되었다. 병조참판은 아들 지남이 무과에 올라 부정이었고 창의하여 선무공신이었다. 또 아들 철남은 부장이었고 선무공신이었다. 지평도 외아들 선이 우윤이었고 창의하여 선무공신이며 호는 괴정이다. 제우당도 외아들 정이 봉사였고 정랑으로 증직되었다. 국헌은 두아들 인이 주부이고 창의공신이며 호는 행와이다. 또 구가 판관이었고 선무공신이었다. 참봉은 외아들 근이 진사·참봉이고 선무공신이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선생의 후손이 거의 천년을 이어 내려서 한뜰에 넷 봉새와 한 당에 열넷 의사가 성하고 빛났다. 그러나 세대가 더욱 멀어지니 문헌이 점점 없어졌고 다만 을미년에 중건한 비문을 후손이 였든 진사 경림씨가 지은 것이 있어 관함과 자손록만 전해 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비로소 밀주지구본과 자인 박씨 집 옛 편지 종이를 상고하고 북지 후손 집에 갈무리된 영정 시·찬·시첨이 나와서는 선생의 유적을 환하게 기술할만 하였다. 한 고을 인사들이 의논해서 덕남사에 향사하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또 한벌을 모사하여 열네 의사를 제사하는 용강사에 다 봉안했으니 사문이 높이 보답하는 의전은 진실로 다음 시기를 기다림이 있었거니와 무릇 덕을 좋아하는 우리 무리도 또한 소문을 듣고 권장되는 바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선생의 후손 원경이 나와 함께 사귀어 온지 오래여서 그 숨겨졌던 사적을 밝혀내는 글을 나에게 부탁한다. 이미 여러번 사양했으나 되지 않으므로 감히 옛 기록을 안본으로 해서 위와 같이 서술했으나 망녕된 죄는 피할 데가 없다. 명하기를 「도리로 되기 어려우니 자릉의 솔이던가. 우뚝하게 빼어난 강후의 솔이던가. 곡령 5백년 강상을 심어서 아름답게도 홀로 청청할 송계 솔이던가. 숭정 기원후 2백 11년 무술(헌종 4년) 5월 일 통훈대부 청주목사 청주진 병마첨절제사 상당수성장 진성 이휘령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