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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선생 묘표 밀양군 청도면 고법리 간좌 두덕에 합봉이 있다. 그 무덤은 전조 충신 예부시랑 중서령 송은 박공 휘 천익과 정경부인 성산배씨현보의 따님을 장사한 곳이다. 공의 세계는 신라 시조 혁거세에서 나왔다. 조부는 전조의 평장사였고 우리 임금 「당저(정종)」 때에 영돈령으로 추증함과 동시에 시호를 양호공이라한 휘 간이시다. 부친은 전조 판도판서 은산부원군으로서 시호를 문헌공이라 했으며 우리 임금때에 영상으로 추증되신 휘 영균이시다. 아아! 사람중에는 진실로 그 가세에 관계되지 않은 자가 있기도 하지 마는 근원이 맑아야 흐름이 깨끗해짐도 또한 바른 이치이다. 대저 곧은 충성과 우뚝한 절의를 지킨 충숙공이 아들로 되었으니, 그 세덕의 아름다움은 이치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문헌공이 어진 아버지였음도 의심이 없이 없다. 공은 임신년 고려 충숙왕원년 서기 1332년에 나시니 무인년 조선 태조 7년 서기 1388년에 돌아가셨다. 결, 문장과 도덕은 대개 우리 동방의 명현이였다. 공에게 네분아들이 있어 효도했고 또 넷 며느님이 효성하여 정려로서 천양하는 은전이 있으니, 많은 사람이 기림을 마지 않았다. 공이 돌아가시던 날에 네분 아드님을 불러서 「선천과 후천에 부자간 시대가 다르다. 나는 왕시의 혼에게 돌아가거니와 너희들은 이씨의 세상에 있어 이미 남의 신하로 되었으니, 충성한다면 힘껏 하라.」 하시었다. 그의 청정한 절의는 어느 것이 이학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결, 우리 태조 을해년 1385년에 처음 공조판서로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두번째 형조판서로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안하셨다. 세번째는 예조판서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네번째 이조판서도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섯번째는 좌의정이었으나, 또한 부임하지 않으셨다. 부조현에 갓을 벗어 걸고 학소산에 올라 고비를 캐면서 이씨의 곡식은 먹지 않았으니, 서산의 절의와 같지 않은가. 또 어찌 나라에 드문 충량한 자가 아니겠는가. 공의 아들 4형제가 돌을 다듬어서 묘를 표하려하니 진신선생으로서 이 묘를 지나가는 자는 그의 충절에 감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건문 2년(서기 1400년) 백룡 경신 첫여름 상한에 장수 황희 지음. 상고하건데 김3족당이 선생의 유사 끝에 글을 썼는데 그 글에 「유허신도비가 삽포에 있고 방촌공이 지었다.」 하였다. 그런 즉 방옹께서 이미 묘표를 짓고 유허신도비문을 지었던 것이나 지금엔 없어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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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郡淸道郡西面素古野艮坐原 有合封而墓者 前朝忠臣 禮部侍郞兼中書令 松隱朴公 諱天翊 及貞敬夫人星山裵氏 賢輔女之藏也 公係出新羅始祖朴赫居世 祖前朝平章事 我當宁朝追贈領敦寧 諡良孝公 諱幹 父前朝版圖判書 銀山府院君 諡文憲公 我當宁朝 追贈領相 諱永均 嗚呼 人固有不係世類者而源淸流潔 亦正理也 夫以忠肅公之貞忠卓節爲之子 世德之懿 可以理推 而文憲公之爲賢父也 無疑 公生于壬申卒于戊寅 “缺” 文章道德 蓋我東方 名賢也哉 公有子四孝 又有四婦之孝 闡揚旌閭之恩 濟濟多士 賞歎不已 公永歸之日 呼彼四子曰 先天後天 父子異時 吾歸王魂 汝在李世 旣爲人臣 忠則竭力 其爲淸淨之節 何莫非理學正校“缺” 惟我太祖乙亥 初徵工判不赴 再徵刑判不赴 三徵禮判不赴 四徵吏判不赴 五徵左台不赴 而脫冠於不朝峴 登彼鶴巢山 採其薇兮 不食李粟 豈非西山之節 又豈非罕國忠亮者乎 公之子四兄弟 將閥石而表之焉 搢紳先生之過是墓者 孰不有感歎忠節者哉 建文2年 白龍 孟夏上澣 長水 黃喜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