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page


66page

密城壇碑陰記(밀성단비음기) 醲泉有源(예천유원)하고 靈芝有根(영지유근)하니 人而不知其本(인이부지기본)이 可乎(가호)아 在周之時(재주지시)하여 稱少昊之裔(칭소호지예)가 御龍之後而相尚焉(어룡지후이상상언)하고 漢唐至宋(한당지송)에 統系之説(통계지설)이 尤詳(우상)이라. 逮夫我東(체부아동)하여는 倫叙大明(륜서대명)하여 士大夫家(사대부가)가 益務氏族之考(익무씨족지고) 盖我朴氏(개아박씨)는 肇基新羅(조기신라)하여 其源既遠(기원기원)하고 其支益繁(기지익번)이라 至景明王(지경명왕)하여 有八公子(유팔공자)하시니 密城大君彦忱(밀성대군언침)이 既其長也(기기장야)라. 大君(대군)이 知羅運將衰(지라운장쇠)하고 退老于采邑山水間(퇴로우채읍산수간)하여 卒免甄萱之侵亂(졸면견훤지침란)하고 遂爲麗氏之恪賓(수위려씨지각빈) 하시니 風流峴洗陋亭之名(풍류현세루정지명)이 至今尚傳(지금상전)하고 子孫(자손)이 因貫密城焉(인관밀성언)하니라. 大君衣履之藏(대군의리지장)이 在密州南樓之北而失其傳(재밀주남루지북이실기전)일새 我長陵甲戌(아장릉갑술)에 府伯李惟達(부백이유달)이 與謀本孫(여모본손)하고 共議士林(공의사림)하여 因祭于樓上者(인제우루상자)가 爲數三年(위수삼년)이라. 此是百代之盛擧而力不逮(차시백대지성거이력부체)하여 事遂寢(사수침) 이러니 英祖乙巳(영조을사)에 各派本孫(각파본손)이 又建議尸祝而未克成(우건의시축이미극성)하고 哲宗丁巳(철종정사)에 因太學發通(인태학발통)하여 倡建祠之議而未果(창건사지의이미과)하고 高宗辛巳及丙辰(고종신사급병진)에 繼議壇享者(계의단향자)가 不止一再(부지일재)일새. 往在壬戌春(왕재임술춘)에 建遠德祠于沃川(건원덕사우옥천)하여 以享大君(이향대군) 이러니 會其夏(회기하)에 雨暴注(우폭주)하여 潰樓之北(궤루지북)에 露一巨壙(로일거광)하니 按諸譜牒(안저보첩)컨대 窕域坐向(조역좌향)이 一一吻合(일일문합)이라. 本孫及州之人士且奔走來觀(본손급주지인사차분주래관)하고 咸曰此爲大君墓(함왈차위대군묘)가 無疑(무의)니 遽爾封築(거이봉축)이라 하니 事係愼重(사계신중)하여 議以壇享(의이단향)하고 遠近諸族(원근저족)이 殫誠共力(탄성공력)하여 凡諸壇役(범제단역)을 專任後孫章億(전임후손장억)하여 以石築壇(이석축단)하고 竪穹碑而書曰新羅王子密城大君之壇(수궁비이서왈신라왕자밀성대군지단)이라 하여 俾遂千載之遑(비수천재지황)하고 永作萬世之遺傳(영작만세지유전)하니 此天理人情之所爭也(차천리인정지소쟁야)라. 後人侍讀時龍(후인시독시룡)과 叅奉漢黙(참봉한묵)과 主事尚浩(주사상호)와 副領斗榮(부령두영)과 主事泰鎮(주사태진)과 幼學祥珍春舜(유학상진춘순)이 以容大(이용대)로 属記實之文(속기실지문)일새. 余(여)가 耄昏無能爲役(모혼무능위역)이나 事係祖先(사계조선)하니 義不敢辭(의부감사)하여 謹書其始終于碑之陰(근서기시종우비지음) 하노니. 銘曰(명왈) 景明八男(경명팔남)이 密城君長(밀성군장)이라. 紙其不俟(지기불사)하고 優遊封壤(우유봉양)하사 亭高洗陋(정고세루)하고 峴著風流(현저풍류)라 遺躅不泯(유촉부민)이오. 千載名區(천재명구)라 南數之岸(남수지안)에 山麗水明(산려수명)이라 家乘傳巷(가승전항)에 曰(왈) 公子塋(공자영)이오 賢裔詢謀(현예순모)에 府庠曰諾(부상왈낙)이라 樓上設奠(루상설전) 하노니 靈庶來格(령서래격) 하소서. 尸擬奚祝(시의해축)하여 縟儀方擧(욕의방거)하고 一鄉剙會(일향창회)하니 太學有許(태학유허)라. 天送雨師(천송우사)하여 巨壙自露(거광자로)라. 不待深目(부대심목)하고 證示堂斧(증시당부)로대 猶然愼重(유연신중)하여 不敢遽封(부감거봉)하고 築壇堅碑(축단견비)하여 歲享是庸(세향시용)이라. 不億之麗(부억지려)가 殫竭誠意(탄갈성의)하니 降福洋洋(강복양양)하사 俾熾(비치)하소서. 後孫學生(후손학생) 容大(용대) 謹述(근술) 後孫侍讀(후손시독) 海徹(해철) 謹銘(근명) ------------------------------------------------------------------------------------------------------------------------------- 예천에 근원이 있고 영지도 뿌리가 있으니 사람이 그 근본을 모를 수 있으리오. 주나라 때에도 소호씨의 후예로써 임금이 되었다 하여 조상을 숭상하였고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에 이르러 계통의 설이 더욱 자상하였다. 우리 동방은 인륜이 크게 밝아 사대부집에서 더욱 씨족의 고증이 컸다. 대개 우리 박씨는 조상이 신라에 기초하여 그 근원이 멀고 그 자손이 번성하여 경명왕에 이르러 八공자가 있으니 밀성대군 언침이 그중 맞이다. 대군이 신라의 운이 장차 쇠퇴함을 알고 채읍인 밀양의 산수간에서 늙어 마침내 견훤의 침란을 면하고 드디어 고려의 각빈이 되었으니 풍류현 세루정이 지금도 오히려 전하고 자손이 눌러 살며 밀성을 관향으로 하였다. 대군의 묘소가 밀양 영남루의 북쪽에 있었으나 실전하였으니 우리 인조 갑술(인조十二년)에 밀양군수 이유달이 본손과 함께 사림에 의논하여 누상에서 제 지낸지 수삼년이 되었으니 이는 백대 훌륭한 거사였다. 그러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그 일이 드디어 그쳤었는데 영조 을사년에 각파 본관에서 통문을 발하여 사당지을 일을 말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고종 신사년과 병진년에 이어서 단제 모실일을 의논함이 한두번이 아니더니 전번 임술년 봄에 원덕사를 옥천에 짓고 대군을 배향했더니 그해 여름 폭우로 누의 북쪽에 한 큰 무덤 흔적이 나타났다. 보든 보첩과 분묘의 좌향을 고찰하니 일일히 부합되는 지라 본손과 그 고을 인사들이 분주히 와서 보고 다들 이게 대군의 묘임이 틀림없다 하여 바로 봉축함즉 하였으나 일이 신중한지라 써 단향키로 의논하고 원근제족이 탄성갈력하니 모든 단의 역사는 후손인 장억에게 일임하여 돌을 축단하고 큰비를 세웠으되「신라왕자 밀성대군 단」이라 하다. 천여년 못한 일을 이루고 길이 만세의 유전을 지으니 이는 천리와 인정의 아름다움이다. 후손 시독 참봉 한묵과 주사 상호와 부령 두영과 주사 태진과 유학 상진과 춘금이 용대더러 사설을 기록하는 글을 쓰라 위촉하니 내 늙고 혼미하여 능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으나 선조를 위한 일이라 의리에 감히 사양치 못하고 그 시종을 비뒷면에 쓰고 명하여 왈 경명왕의 八남에 밀성대군이 형이다 그 때 아님을 알고 봉읍에서 노닐다 전자는 세루정이요 고개는 풍류현이라 유적이 길이 남으니 千년의 명지로구나 영남 루의 언덕에 산 곱고 물 맑도다 가보나 전하는 말에 대군의 묘소라 하니 후손이 의논하고 부사도 좋다하여 누상에 제물을 올리니 혼령이 흠향했으리 이에 시축을 의논하여 의식이 시작되니 한 고을이 회의를 하고 태학관에서 허락하라 하늘이 우사를 보내어 묘소가 나타나니 자세히 보지 않아도 묘소임이 틀림없도다 그러나 신중히 할지니 감히 봉축치 못하고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해마다 향사하네 많은 후예들이 성의를 다하니 복이 양양히 나리어 창성하고 번식하리라 신라 기원 一九八一년 갑자 五월 일 후손학생 용대 근술 후손시독 해철 근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