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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족보 密陽世譜 1621년(광해군 13) 신유세보 신유세보서문 옛날 구문충(毆文忠)과 소노천( 蘇老泉)이 각각 세보를 두었는데 구문충은 한(漢)나라 연대표를 의지하고 소노천은 예기(禮記)의 대소종으로 차례를 하였으니 그 예는 비록 같지 않으나 다 그 세차를 상고하는데는 족한 것이다. 그 세차를 알지 못하면 그 원근 친소의 분별과 본원(本源)의 나은바를 알지못할 것이다. 물과 나무에 비하면 처음은 한 근원이요 한 뿌리인데 근원이 깊은 후에 일백줄기가 나뉘고 뿌리가 굳은 후에 일천 가지가 뻗어 나나니 사람이 어찌 이에 다르랴. 삼가 살펴 보니 예기에 아버지를 같이한 자 형제요, 할아버지를 같이한 자 종형제요, 증조를 같이한 자 재종형제요, 고조를 같이한 자 족이라고 하였으니 이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치(親)과 정(情)이 다하여 노상행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에는 다 한사람 몸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한 근원의 물이 일백 줄기가 나뉘고 한뿌리의 나무가 일천 가지가 뻗어남과 다르겠는가. 우리 밀양박씨는 신라왕(新羅王)에 근본하여 팔군(八君)이 각지방을 나뒤 다스림으로부터 성씨는 같으나 관향은 다르게 하였다. 우리 종(宗)은 밀성 대군을 중조로 하고 신라 고려를 거쳐 이조에 이르러 팔방에 번성하여 동국의 대성이 되었다. 이문정공(李文靖公)이 팔가(八家)가 다 후손이 있는데 밀성이 더욱 들랐다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대군의 뒤로 부터 동경중 옆에 이르러 휘 욱(郁)은 삼한 대장군이 되었고 아들 휘 란(蘭)은 요동독포사가 되었으니 이문충공이 이른바 밀량의 박씨파 흐름이 심히 성한데 그 근본은 다 공(公)에서 나왔다고 한것이 오른말이다. 이로부터 四대(代)가 보첩에 실전되었고, 고려때 각 파가 중조(中祖)로 일컬은 분도 十二명공(名公)이었다. 시중 밀성부원군 휘 언부(彦浮)는 실로 나의 중조요 도평의사밀직군(都評議使密直君) 휘 언상(彦祥)과 우복사밀직군(右僕射密直君) 휘 언인(彦仁)과 사문진사(四門進士) 휘 원(元)과 밀성군 휘 척(陟)과 사헌규정(司憲糾正) 휘 현(鉉)과 중서밀직군(中書密直君) 휘 중미(中美)께서도 나의 중조이신데 혹은 형제요 혹은 후손이며 밀직부사(密直副使) 휘 양언(良彦)과 영동정(令同正) 휘 원광(元光)과 판도판각(版圖判閣) 휘 천익(天翊)과 삼사좌윤(三司左尹) 휘 을재(乙材)와 정국군(靖國君) 휘 위(葳)는 모두 대군의 후손인 즉 마땅히 세차를 상고하여 소목을 밝혀야할 것인데 대장군 이상 독포사 이하는 시대가 창상(蒼桑)이라 문적(文積)이 너무 간략하니 사가(史家)의 의심난 것은 궐한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겠지만 고려말년 이조초에 각파의 명공 께서는 옛 세대가 멀지도 않고 세계의 잃음도 없는데 중조의 분파를 자상하게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 어떤 까닭인가. 옛날 서문충공(徐文忠公)의 화산(華山) 족보 서문에 우리 동방이 예로부터 종법과 족보가 었어 비록 명문 거족 이라도 가승도 없고 다만 두어 세대만 전하니 증조.고조 이상은 기록치 않고 자손들도 점점 정의가 성그러져서 혹 시공(緦功)의 친함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 종중의 보첩을 읽어 세계가 궐하게 됨도 이런 연고인가. 임진 왜전의 병화에 공사(公私)의 문적이 거의 없어 졌은 즉 혹 대보가 있다해도 불타버려 자상하게 상고할 수 없는 연고인가. 내 일찍 우리 종중 두어집 간행한 족보를 살펴보니 다만 그 중조 일파만 기록하였으니 이 친족을 너르게 합하는 뜻이 아니다. 나의 국담 선조께서 일찍 구보를 의거하사 추선록(追先錄)을 편찬 하시면서 약간 각 중조의 일파를 기록하고 세보를 이어 편찬할 뜻을 우리 후손에게 끼쳐 주셨고 나의 중부 술재께서 진사 직장 여러 종숙과 더불어 이 뜻을 술선(述先)에 두셨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내 항상 개탄하였다. 경신년 겨울에 동생 윤광(胤光)과 더불어 경외(京外) 제종에게 통보하여 수보할 것을 알렸더니 사문(斯文) 계산세봉(稽山世鵬)씨는 나의 선조 문절공 도은 선생의 파예(派裔)라 신유년 봄에 호서(湖西) 종인들과 더불어 제학방조(提學傍祖)의 이하 파까지 수록하여 동고(東睾) 서당에 나를 찾아와 二개월 동안 머물면서 함께 교정을 하였다. 도주의사겸(道州之思兼)과 밀주지증엽(密州之增曄)이 은산파의 구보를 안고왔으나 은산군은 나의 행산선조의 백파이다. 이에 우리 중조 일파와 비로소 합록하고 또 十一제파를 이어서 기록하였으니 가히 연계(聯系)가 된지라. 이에 세보를 편성할 때 국사와 가장을 상고하여 성을 받은 본원과 시조의 분봉사실을 기록하고 또 그 세대와 서열 중조를 살펴 자손을 기록하였으니 아울러 아름답고 연이어 꽂다워라. 참으로 빛나고 성하도다. 그 도덕 문장과 충효 절의가 앞뒤를 서로 이어 졌다. 혹 공이 사직(社稷)에 있어 간책(簡冊)에 빛나며 혹 사문(斯文)에 도가 높아 사림(士林)에 사표(師表)되어 혹 세상을 멀리하고 지조가 높아 백대의 풍성이 솟았으며 혹 의를 따르고 세상을 피하여 만고의 강상을 세워 크게는 국맥을 붙들고 적계는 문호를 빛냈으며 각 파의 외손들도 명현석학이 많아 이따금 국조선원(國朝璿源)을 도왔은 즉 우리 시조의 쌓은 덕과 남은 경사를 가히 증험하겠도다. 보책을 이미 이루매 여러 어진이의 행적을 가려내어 간략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또 구양(歐陽) 족보를 의방하여 대군 뒤 十二중조 계도를 그려 위에 붙이고 높이 모신 국계를 책 머리에 써서 밀량박씨 연계대보라 하였으니 총 三十권이다. 이에 인출하여 팔방 제종에게 반포하여 먼 후손으로 하여금 다 관향을 받은바와 파류의 나뉜 바를 알게하니 가히 은의가 돈독하고 윤리가 바르다고 하겠다. 오라, 우리 밀관동종(密貫同宗)이 보첩을 잃어 중조는 비록 다르나 모두 우리 대군의 후손이니 이 연계보가 옛날 황액(黃渥)이 족보를 읽고 억지로 황산곡(黃山谷)을 형제라고 한 것이 비교해 보면 판연이 다르다. 각 파가 동보하지 못한지가 자못 千여년인데 오늘날 처음으로 합보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옛날 소목공(昭穆公)이 서주 종족까지 규합했는데 군자들이 종법이 치법과 더불어 서로 서로 좌우된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연계보가 종족을 합하는 뜻인 즉 다만 우리 일문의 사사로움만 아닌 것이다. 주자 말씀에 "보계가 밝은 후에 효제의 도가 나고 충후한 바람이 행한다" 고 하셨으니 옛날 각파가 소원(疏遠)하여 길손과 같은 자 이로 인하여 백세의 친함을 알 것이니 우리 보중 사람들은 먼저 효제로 서로 전하고 충효로서 서로 힘쓰면 세상을 다스리는 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영조十八년 임술(壬戌=서기1741년) 秋 七월 十六일 후손 윤현(윤현) 근서 출처 : 밀성박씨 졸당공파보(기사보) 1권 1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