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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가야식 금관도 있어 대가 야의 왕권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토기양식에 있어서도 대가야 토기양식이 확립되었고, 그것이 고령∙합천∙거창∙산청∙ 남원에까지 확산되고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고령의 남쪽, 낙동강과 황강의 합류지점인 합천군 쌍책면에 위치하는 옥전고분 일대는 다라국(多 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던 곳 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 옥전고분 발굴 결과, 고분양식도 독특하고 출토유물도 금장식 대도, 갑옷, 투구, 유리잔 등 화려하고 질높은 유 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그런데 유물양식이 낙동강 건너 맞은편의 창녕양식도 있고 경주양식도 있고 독자성이 강한 양식도 있어, 다라 국이 한동안 강력한 독자세력으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 세기 후반부터는 토기양식이 고령양식으로 모두 바뀌고 있어 근처 의 다른 지역과 같이 고령의 대가야 영향권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주 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영역을 확보했던 대가야도 6세기 중반(562년) 신 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함으로써 가야 전체가 신라에 의해 복속 되고 말았던 것이다 ─ 김세기∙경산대 박물관장 향토와 문화 33 ▲ 봉토를 제거한 고령 지산동 33호분 전경. 사진/계명대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