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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역 진출의 거점지역이었다. 신라의 진흥왕이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창녕을 복 속시키고 진흥왕 척경비를 이곳에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창녕을 신라의 영역으로 보거나 또는 독자적 영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창녕지방의 고분은 묘제상으로는 가야지역의 일반적인 양식에 이 지역의 특성이 더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신라식인 적석목곽 분도 조사된 바 있고 출토유물에도 토기∙금동관∙귀걸이 등에 신 라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거기에 고령양식, 창녕양식이 포함되어 이 지역의 문화가 신라∙가야의 두 문화가 복합되어 있는 특성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성주는 낙동강 서안지역에 위치한 지역으로 삼국유사에 성산 가야 혹은 벽진가야로 나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성산가야는 국 명만 나와 있고 내용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역사서에도 전혀 나오 지 않아 사정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성주군내에는 세 곳에 큰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고, 특히 읍내의 성산동 고분군에는 대형봉 토분 120여 기가 분포하고 있어 소국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 성산동 고분에서는 많은 토기류와 장신구류 등이 출토되었는데 문화양상이 인접한 고령과는 판이한 성격을 보이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토기의 양식이나 묘제의 양식이 오히려 낙동강 동안인 대구 비산동∙내당동 고분과 가까워 대구지역과의 친연관계를 보이고 있 는 점이 특징이다. 성주군 벽진면에‘태자공기돌’이라는 바위는 벽진가야에서 대가 야의 왕자를 인질로 잡아와 보내지 않았는데 그 왕자가 고향을 그리 워하며 놀던 공기돌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설로 보나 앞에 말한 토기양식이 판이하게 다른 점으로 보아 대가야와 성산가야는 서로 이질적 문 화를 가지고 다른 문화권 속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4) 고령의 伽 대가야는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회천이 만들어 놓 은 충적평야와 가야산 줄기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 지에 해당하는 고령읍에 위치한다. 대가야는 종래 ‘삼국지’에 나오는 미오야마국이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 있어 왔으나, 최근에는 변진 반로국( 國) 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대가야는 동국여지승람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가야산신인 정견모주( 見 )가 태양에 감응되어 뇌질주일과 뇌질청예의 형 제를 낳았는데 형인 뇌질주일이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고 동생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왕 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가야 중심의 건국 설화로 금관가야 중심의 수로설화와 대조를 이루 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대가야는 4세기경부터 급 격히 성장하여 5세기에는 야로의 철산을 개발하고 고령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교역하면서 가야 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 후반에 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 를 맺고 주변지역인 합천∙함양∙거창∙산청 지역 을 복속시키고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운봉고원과 섬진강을 따라 하동까지 진출하여 가야 최대의 영 역을 확보하였다. 이 대가야에 대하여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라고 보거나 대가야연맹이라고 부르기 도 하는데, 최근에는 대가야를 어느 정도 집권력을 가지는 부체제( )를 확립한 영역국가로 보는 설이 대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가야 왕권을 뒷받침하는 유적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 이라 할 수 있다. 가야지역 고분 중 최대의 고분유적인 지산동 고분 군은 뒤에 주산성을 배경으로 산능선을 따라 산봉우리처럼 큰 봉토 분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44호분에서는 주인공 석실 외에 부장실 2 개와 주위에 순장곽 32개를 둘러 약 40여명을 순장시킨 순장묘가 발굴되었고, 또 다른 고분에서는 가야식 금동관을 비롯하여 갑옷, 투구, 금동제 마구 등 집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 32 향토와 문화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대가야 신라 백제 성주 고령 함안 고성 진주 김해 가야 연맹의 위치 동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