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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낙동 강과 관련하여 가야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은 낙동강 중류에 해당하는 성주의 성산가야, 고령의 대가야 및 창녕의 비화가야, 함안의 아라가야가 있 고 하류인 김해의 금관가야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 들 낙동강과 관련된 가야 중 하류부터 가야의 역사 와 문화를 살펴보도록 한다. 낙동강 유역 伽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 1) 김해의 금관가야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에 위치하였던 나 라인데 변한의 소국이었던 구야국(狗 國)이 발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앞서 본 삼국유사에 의하면 구지봉(� )에서 6개의 알이 하늘로부 터 내려와 동자가 태어났는데 그 중 가장 먼저 태 어난 수로가 금관가야의 왕이 되고, 나머지가 5가 야의 왕이 되었고, 그래서 수로왕의 금관가야가 6 가야연맹의 맹주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금관가 야를 중심으로 한 건국설화로 금관가야가 가야 초 기에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 는 것이다. 금관가야는 낙동강수로를 이용한 내륙교통과 바 다를 이용한 북쪽의 중국 군현지역과 일본 등지로 의 교통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야에서 생산되는 철을 중국 군 현이나 일본에 수출하고 그들의 선진문물을 가져와 내륙에 있는 소 국(가야제국)에 중계해 주는 중계무역의 이점으로 급격히 발전해가 고 그것을 기반으로 4세기경까지 가야연맹의 맹주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이후는 급격히 발전하는 고령의 대가야 세력에 주도 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 금관가야의 실체가 근년의 발굴조사로 속속 드러나고 있는데 그 중 중요한 유적이 김해 양동리 고분유적이다. 대형의 목곽묘를 비롯 하여 소형의 목곽묘 등 400여 기의 무덤에서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 청동 솥과 철제 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 상당히 발달한 문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금관가야 최고지배층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발굴 에서는 대형목곽묘에서 김해식 토기류를 비롯하여 器∙ 器∙수정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철제갑옷∙투구 등 철제 품들이 다량 출토되었고 특히 철기의 재료로도 쓰이고 화폐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는 덩이쇠( )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통해 보면 당시의 금관가야는 역시 바다를 이용 하여 중국∙일본 등과의 교역을 주도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했던 금관가야는 5세기가 되면 서 신라의 압박과 낙동강 중류 세력의 성장 등으로 급격히 쇠퇴하여 마침내 53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함안의 아라가야 아라가야는 삼국지에 보이는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안야국( 國)이 발전한 것으로 낙동강 본류와 큰 지류인 남강이 합류하는 합 강지점의 남쪽인 함안에 있었다. 이곳은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부로 서 수로를 이용할 때 남강 및 낙동강을 통해서 가야 전지역으로 연 결될 수 있는 교통의 요로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계 곡을 따라 곧 남해와 연결되는 중요한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유력 한 가야세력이었다. 그러나 문헌에서 아라가야의 성립과 발전과정 등의 역사기록은 찾 을 수 없고, 다만 서부 경남 일원에 있었던 여러 세력의 대표격으로 김해의 금관가야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국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3세기경 안야국(아라가야)을 비롯한 이른바 대상팔국( 國)이 연합하여 김해의 금관가야를 공격하는 세력으로 되어 있고, 또 6세 기 중반‘일본서기’에는 가야 여러 세력들이 신라와 백제의 공격으 로부터 가야를 지키기 위한 공동대책을 수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아라가야의 문화로는 현재 함안읍 중심지의 말이산고분군에 직경 20m가 넘는 대형고분들이 줄지어 남아 있어 그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고분에서는 갑주 등의 무구류와 장신구 등의 위세품이 출토되었다. 특히 토기 받침대에 불꽃모양의 구멍을 뚫은 화염문투 창 토기는 함안의 특징적인 토기인데 이 토기의 분포지역이 함안을 비롯하여 마산∙창원∙의령∙사천까지 퍼져 있어 아라가야의 영향 권이 넓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3) 창녕의 伽 와 성주의 伽 창녕은 낙동강 중류의 동안지역으로 화왕산의 산성을 배경으로 형 성된 가야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비화가야 역시 건국연대 나 발전과정은 문헌에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간헐적으로 나타날 뿐 상세한 기록이 없어 분명하지 않다. 이 지역은 낙동강 동안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낙동강 서안의 유력 한 세력인 다라(多 , 합천 쌍책)를 마주하고 있으며 북서로는 고령 대가야, 남서로는 함안 아라가야의 중간적인 삼각지점이 되고 또 계 곡을 따라 신라와 바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신라의 낙동강 향토와 문화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