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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24회) • 황해도 연백군 만세시위(6) 99 “김덕원 선생이 시켰다고 하면 놓아 주마.” 고문에 못 이긴 소년들은 마침내 시인하고 조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김덕원 선생과 다섯 소년은 인력거 에 태워 연안헌병대로 넘겨졌다. 연도에는 동네 사람 들이 모두 나와 늘어서서 지켜보았다. 아주머니 할머 니들이 삶은 밤, 엿, 떡을 인력거 발판에 놓아주었다. 오기영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가 어린 애국자의 모습을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모습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잊지 못했다. 오기영을 비롯한 다섯 소년은 그날 저녁에야 풀려났다. 김덕원 선생은 징역 8월 형을 받았다. 오기영의 거사는 다섯 살 위 형 오기만을 분기시켰다. ‘동생도 했는데, 우리들은 못했다.’ 자괴감으로 분발한 오기만이 친구들과 만세 부를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었다. 30여 명이 붙잡혀 갔다. 아버지가 잡혀갈 때 애써 태연하던 어머니, 오기영이 잡혀갈 때는 자랑스런 눈빛까지 보였던 어머니가 형 이 잡혀가자 안절부절못했다. 만나는 동네 아주머니 들이 위로할 때마다 어머니는 오기영을 가리키며 말 했다. “저것이 잡혀갈 때는 설마 어린 것을 어쩌랴 싶 어 걱정이 없었는데, 놓여나온 뒤에 보니 전신에 피 가 맺혔더구려. 그러니 한 살이라도 더 한 것에는 매 가 더하지 않겠 소.” 하며 눈물 지었다. 형 오기 만은 아버지처 럼 해주감옥으 로 넘어갔다. 황해도 연백 군 배천면 만세 시위는 이렇게 12월 중순에 가 서야 끝났다. 그 러나 오기영 집 안의 독립운동 과 수난은 해 방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형 오기만은 출옥 후 사회주의 독 립 운동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가 옥에서 들것에 실려 나 와 결국 목숨을 잃었다(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 오 기영이 붙잡혀 간 얼마 뒤에 태어난 막내 오기옥은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왔다. 막내 매제 강기보 (康基寶)도 감옥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필자 오기영 도 네 번이나 철창생활을 했다. (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3 ٠ 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 임 했고,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3 ٠ 1운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강연을 하고 있다. 필자 이정은 오기영의 5세 위 형 오기만. 1934년 5월  6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 소에 수감되었을 때(국사편찬위원회, 「일 제감시대상인물 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