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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119회) • 황해도 연백군 만세시위(1) 99 름져 벼농사와 잡곡 재배에 적합했고, 풍요로운 수 확은 마을의 경제적 안정과 문화적 여유를 낳았다. 이 때문에 연백 일대에는 누각과 정자, 대(臺)가 많았 다. 누각은 마을의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는 장소였으며, 정자와 대는 마을 공동체의 자 부심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이러한 자연적·문화적 배경은 연백 사람들에게 강 한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었고, 외적의 침입과 억압 에 맞서는 저항정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연안읍의 전통과 항일의 맥 연안읍은 역사적으로 호국의 성지라 할 만한 고을 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은 연성대첩(延城大捷)의 무 대가 되었다.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 끄는 5천여 병력이 연안을 침공했으나, 조선군과 의 병들이 힘을 합쳐 이를 격퇴하였다. 연성대첩은 진 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 나로 꼽힌다. 또한 조헌(趙憲, 1544~1592) 의병장의 고향이 바 로 연안이다. 조헌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00명의 의병을 모집해 금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 우다 장렬히 전사하여 오늘날까지도 ‘금산 700의사’ 라는 이름으로 기려지고 있다. 한말에도 연안 지역 유림들은 의병 봉기에 적극적 으로 나섰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유인 석, 최익현 등과 연결되어 항일 의병 활동을 이어갔 다. 특히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평산 일대 의병부 대와 합류하여 활약했으며, 돌격장 김창호(金昌浩)는 연안읍을 습격하고 배천 군청을 점령하는 등 일제 통치에 맞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연안 지역은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전 통과, 항일운동의 맥락 속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 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전파 1919년 3·1운동은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 각지 로 확산되었다. 연백군으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 은 2월 28일 늦은 밤이었다. 이날 경성 감리교 상동 교회 전도사 이종화(李鍾和)가 연안면 산양리 예수교 목사 손창현(孫昌鉉)을 찾아왔다. 그는 독립선언서 100매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읍내 사람들을 교회당으로 불러 모아 독립만세를 부르셔요.” 손창현 목사는 다음날인 3월 1일 오전 8시, 봉남 리 교인 조우삼(趙友三)을 불러 독립선언서 20매씩 을 해룡면 전도사 홍성환(洪性煥)과 호남면 김창현 (金昌鉉)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조우삼은 곧장 홍성환과 김창현에게 선언서를 전했고, 홍성환 은 받은 선언서를 다시 지역 인사 7명에게 배포했다. 연안면 전도사 장정근(張貞根)도 손창현 목사의 부 인으로부터 선언서 10매를 받아 김모, 송경오(宋京 五) 등 지역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전도사 신자도(申 子道)는 읍내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배 포하고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교회 조직망을 활용하여 빠르게 선 언서를 퍼뜨렸다.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이자 동시에 항일의식이 공유되는 공간이었고, 선언서 전달과 만 세운동 준비의 거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곧 일제 당국에 포착되었 다. 당시 황해도장관 신응희(申應熙)의 보고서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