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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동남아지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99 또한 도산은 마닐라 방문중에 필리핀의 중국인들 에게 한국혁명과 중국혁명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하였다. 그러한 내용은 마닐라에서 발행되는 중국 신문 『민호보』에 자세하게 게재되었다. 한국이 “최 후로 채용할 혁명방략은 일본의 정치‧경제‧군사 행동을 파괴하여 일본제국의 통치를 벗어나도록 극 단의 수단까지라도 써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산 은 이미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기관 에 대한 파괴 등의 의열투쟁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의거 직후 일제에 체포되면서, 필리핀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겠다는 도산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만일 도산이 필리핀 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웠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도산이 긍극적으로 필리핀에 남긴 꿈은 중국지역을 대신할 독립운동의 책원지였 음에 분명하다. 이승만, 서울주재 미국영사의 주선으로 마닐라 상륙 이승만(1875~1965)은 중국 상하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래 서 이승만은 개인비서인 임병직과 함께 1920년 11 월 12일 화란국(네덜란드) 소속의 웨스트 하이카호 (S. S. West Hika)를 타고 중국으로 향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상하이에서 업무를 시작하면서 국무총리 이동휘 등을 비롯한 각료들과 임시정부의 노선과 운 영방법 등의 현안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 승만은 대통령 집무를 시작한 이후 임시정부 각료들 과의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또 이승만 반대파 에서는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들고 나와 그의 사임 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상하이를 떠나 난징 ‧ 소저우 · 항저우 등을 여행하며 외곽에서 머물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운영과 독립운동 진행방침 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이 없이 난국을 타개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5월 17일에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을 이유로 상하이를 떠난다는 교서를 임시의정원에 보내고, 5월 28일 콜롬비아호 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하와이로 향했다. 그는 6월 2 일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지만, 여권이 없어 하선 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이승만과 동승했던 배 에서 3 · 1운동 당시 서울주재 미국영사인 베르그 홀 쯔(Leo Allen Bergholz)를 만났다. 베르그 홀쯔는 중 국 광둥[廣東]주재 영사로 와있다가 이승만과 같은 배를 타고 마닐라로 왔다. 베르그 홀쯔가 손을 써서 이승만은 마닐라 호텔에 투숙할 수 있었다. 베르그 홀쯔 영사는 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조사 하여 미국 국무부에 일제의 잔학상을 알렸다. 이승 만은 마닐라 호텔에 숙박을 정했고, 마닐라에서 필 리핀 최대의 휴양도시인 바기오(Baguio)까지 가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6월 15일 마닐라 항구에서 그래닛 스테이트호(S. S. Granite State)를 타고 마닐 라항을 출발하여, 31일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아시아약소민족대회 개최 계획 안창호의 필리핀 순방이 있은 약 1개월 후 상하이 에 있던 여운형이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하게 되었 다. 여운형은 1929년 5월 3일부터 6월 3일까지 30 여 일간 마닐라에 체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운 형이 필리핀에 가게 된 이유는 형식적으로 중국 푸 단대학(復旦大學) 학생들로 남양원정축구단(南洋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