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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포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 국토를 강점했을 때 목숨을 던져 항일 구국 전선에 앞장 선 선열들이 아니 계시었던들 어찌 우리 조국이 광복 되었으리오. 우리는 유서 깊은 월아산(月牙山) 자락에 청석(靑石)을 세워서 애국지사 박호종(朴鎬鍾) 공의 행적 일단을 새김으로써 길이 후손들에 전하려 한다. 공의 자는 성칙(聖則), 호는 만촌(萬村)이요 본관은 밀양으로 신라 박혁거세 왕의 후예이며, 고려조 규정공 휘 현은 중시조요 조선조 부정공 휘 이는 파조요 송월당 휘 호원은 중세 현조이다. 5대조 휘 재문공이 의령에서 진주 금산면 가방리로 이거하면서 자손들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고조의 휘는 유신이요 증조의 휘는 수찬이요 조는 휘가 건호요 고의 휘는 헌홍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으로 유명하였고 비는 파산이씨 필기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고 슬하에는 2남 1녀를 두었다. 공은 1903년 가방리 세제(世第)에서 출생하니 용모가 출중하고 총명이 과인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다. 장성함에 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12세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3학년 때에 기미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될 즈음 진주에서도 시일을 기하여 격렬한 만세세위가 전개되니 공도 피 끓는 의분으로 이 대열에 가담하였다. 이 사건으로 진주 경찰서에 연행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