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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만촌 밀양박공 호종 추모비, 비석에서는 호가 萬材(만재)로 보이는데 자료에는 萬村(만촌)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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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제일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26년 경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경,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야학회를 설립하고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며 안으로는 식민지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9월 진주지역에서는 송기호·조삼수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공산주의자 진주지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농민위원회 . 노동위원회 . 학생위원회 등이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박호종은 농민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금산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박호종은 비밀결사 조직을 위해 금산면에서 농민을 규합한 후, 진주읍내 남강(南江)에서 회합을 가졌다. 또 같은 해 11월 그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인쇄소에서 항일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피체되어 7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3년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