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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동남아지역에서의 한국독립운동 97 내 주요 거점이 된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 일 간의 치열한 접전지가 되었고, 그 와중에 일본 에 3년 이상 점령당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필리핀 마닐라에 갔던 역사는 의외로 오 래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시 진주사람 조완벽이,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 그는 일본 상인 의 눈에 띠어 1604년부터 1606년까지 남부 베트남 과 필리핀에 돌아다녔고, 1607년 고향에 돌아왔다 고 한다. 그렇다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는 한국 인들이 언제부터 살았을까. 임진왜란 이후인 1614 년, 일본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해 필리핀 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필리핀으로 갔던 천 주교 신자들 가운데는 한국인 여자 1명과 남자 2명 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 명의 이름은 박마리나(Park Malina, Mary Park), 토마스(Tomas), 가요(Gayo)이 다. 이들은 중국인이나 필리핀인들과 격리되어 마닐 라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외곽의 산 미구엘(San Miguel) 마을에 살았다. 3명의 한국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천주교인이 되었던 사람들 이었다. 박 마리나는 마닐라의 파시그(Pasig) 강에 인접한 산 미구엘에서 살다가 1636년 5월 24일 64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닐라에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경부터였다. 필리핀의 화교들을 상대 로 고려인삼을 팔았던 한인들이 마닐라에 정착하 며 살았다. 필자는 필리핀대학 게레로(Milagros C. Guerrero) 교수로부터 1900년 초 한국인 인삼상이 필리핀을 오고 갔다는 자료를 보았다는 말을 들었 다. 1900년 경부터 마닐라에 고려인삼상들이 거주 하기 시작했던 것은 분명하다. 필리핀 초대 교민단 회장이었던 박윤화도 “상투를 틀고 도포행전 차 림으 로 인삼뿌리를 바랑에 짊고 다니던 삼(蔘)장수가 필 리핀의 ‘코리언 파이오니아(Koreean Pioneer)’라고 말하고 있다. 인삼을 팔던 사람들이 처음에 마닐라 에 살았던 사람들이고, 이들이 동남아 각지를 돌아 다니며 고려인삼을 전파하였다. 한국과 필리핀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외 세의 침탈로 점철된 20세기 초였다. 이후 40여 년간 두 나라는 ‘식민지국’이라는 불행한 역사적 경험을 겪어야 했다. 주지하다시피 1905년 7월 29일 일본 수상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미국 육군성 장관 태프 트(William Howard Taft)가 도쿄[東京]에서 맺은 비 밀협약(Taft-Katsura Agreement)으로 인해 한국과 필리핀은 일본과 미국의 흥정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도산 안창호, 만주 한인 이민 추진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1929년 필리핀 동포의 소식을 보도한 「비 도(比島)에 우리 동포」 기사(『신 한민보』 1929년 5월 16일자) 산페르난도 시내의 전적비(the  Battle of San Fernando). 1945 년 2~3월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 로 전투를 치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