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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에 처한 국가를 좌시하지 않고 우국충절의 의분을 구국운동에 몸소 실천하였음은 국민된 도리이며 또한 국가의 소명이다. 차제에 국난극복의 충성된 양심을 가진 상당 허공 상회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민족의 개화와 현실의 소명의식만이 조국광복의 첩경이라는 신념으로 향리에서 한학에 열중하시며 면학하는 한편 우국동지들을 규합하였다. 때마침 폭악무도한 일제가 1919년 2월에 고종황제를 시해하였으니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분기하여 민족이 자주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자 공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동공원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시고 수차에 걸쳐 시위운동을 하시였다. 이어서 향리에서도 거사할 것을 결심하고 하향하시어 사택에 마참 고종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가한 사형 상기 선생 사제 상구 선생과 모의하고 거사일시를 이원시일인 동월 27일로 결정한 바 당일 운집한 3백여명과 같이 일대 시위운동을 하시였다. 공은 너무도 분격한 나머지 군중들과 같이 일헌병파견분대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헌분대장 기시모도(안본이작)와 그 부하들을 처단하고 주재소를 파괴 방화한 후 옥천으로 진입하여 일헌병파견대를 급습하던 중 대전에서 급파된 일헌증원대와 교전하다 피체되셨다. 이후 선생께서는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굴함이 없이 항거하시드니 마침내 1945년 8월 조국 광복를 맞으셨다. 정부에서는 공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공적비를 기리여 1968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를 추서하였다. 또 1958년 8월 15일에는 옥천군민이 이원역 광장에다 기미 3.1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이와 징표를 달리하여 이곳에 공적비를 근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