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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운과 만암 봉휘를 재상으로 모신 유서 깊은 터전에서 성장하였다. 1910년 나라를 잃은 후 선생은 조국광복의 뜻을 품고 도일하며 1913년에 명치대 전문부 3년을 수료하고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서 세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1928년 9월 18일에 전라남도 소년연맹창립주모자로 금고 4월형, 1929년 7월 15일에 사유재산 반대투쟁으로 2년간 투옥,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형제봉 만세사건에서 소작철폐농민저항운동의 주동자로 5년형을 받는 등 영어의 몸이 되어 온갖 고초를 겪고 1934년 3월 7일 만기출소하였다. 대구복심법원 재판 때 판사가 왜 한국말로만 답하느냐는 질문에 "나는 일본글을 읽을수는 있지만 말은 못 한다"하고 당당하게 대답하였으며 수감중에 한마디도 일본말을 하지 않아 신념 강한 지사정신을 보였다. 광복이 되자 선생은 독립 조국의 기틀을 다지고 질곡 속에 허덕이는 농민대중을 구제하기 위해 신명을 바쳤다. 1945년 12월 전국농민조합 총연맹 중앙위입행위원회 부위원장, 1945년 12월 독립촉성회의 중앙집행위원, 1948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고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의 좌우이념을 떠난 민족의 자주성회복, 신탁통치반대, 농민권익보호에 나섰다. 참으로 절통하고 애석하여라. 선생은 1950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납북되었으며 분단의 고통 속에서도 여생을 우리민족역사를 연구하다가, 1968년 3월 16일 두고 온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북녘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슬하에 승, 인하, 인봉, 인학, 건을 두었으며, 승은 칭송받는 효자로, 인학은 한양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