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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5년 9월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②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교는 설립된 지 6년만인 1914년 여름 학교 문을 닫 게 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가 문을 닫은 이후인 1916년 11월 당시 네브라스카대학에 재학중인 한인 학생은 정한 경·양긍목·정양필·이홍주, 링컨농학중학교 한시호, 링컨중학교 양일태, 네브라스카음률대학 조규섭·이 무일, 미네소타대학 이명섭·이정섭, 오마하관립중학 교 김홍기·임학봉·권태용 등이었다. 그리고 헤이스 팅스대학에는 이종희·유진석, 예비과에 재학중인 학 생은 이창수·이창일·조식·조동현·신덕·김규돈·김병 현, 중학생 6명, 특별생 1명 등이었다. 한인소년병학교에서 박용만의 역할 한인소년병학교의 생도들은 대부분 미국 문화와 한국사회를 모두 경험하였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 하였다. 박용만은 덴버에서 네브라스카주 링컨으로 이주하여, 이곳에 유학하는 한인 학생들을 위해 P가 721호에 학생기숙사를 설립하였다. 박용만이 한인 학생기숙사의 감독으로, 유은상이 주무를 맡았다. 박용만은 한인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소개해 주고, 영어와 국어 등도 가르쳤다. 미국으로 유학을 온 면암 최익현의 제자 김현구가 1909년 9월 중순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 를 찾아가 그곳 기숙사에 머물면서 소학교 5학년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한인소년병학교에서는 박 용만이 학과와 일상생활 등을 감독하였으며, 그리 고 매일 영어와 국어를 강습하였다. 기숙사에서의 모든 일상사는 유은상이 주관하였고, 매주 토요일 에는 시사에 대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매 주 일요일에는 기도회가 있었는데, 이는 박용만이 주관하였다. 박용만은 “부국강병의 제일 급무는 인민 전체 다. 1인의 예외가 무(無)한 납세(納稅)와 군사복역(軍事服 役)의 양개(兩個) 의무를 절실히 이행”하여야만 한다 고 주장하였다(김현구, 『우성유전(又醒遺傳)』). 한인 소년병학교 학생들은 처음 13명에 불과했지만, 1백 여명의 한인들이 이곳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여름방학에 한인소년병학교에 들어온 생도들은 아침 6시에 기상 나팔과 동시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 고 아침을 먹는다. 아침 식사 후에 학생들은 한 시간 에 20~25센트씩을 받고 일을 하고, 남은 학생들은 학교농장에 가서 일을 한다. 모든 학생은 오전 12시 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후 운동 을 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각자 두 시간 가량 공부를 하고, 군복으로 갈아 입고 군기(軍器)를 갖고 군사훈련을 한다. 오후 6시에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 으로 간다. 그후에는 각자 축구, 달리기, 총쏘기, 풍 류치기, 나팔불기 등 취미 활동을 한다. 밤이 되면 정 해진 교실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불이 꺼지면 취침 을 한다. 여름학기 동안 소년병학교 생도들의 일과는 그야 말로 쉴틈이 없이 바쁜 시간으로 짜였다. 그리고 8월 하순이 되면, 또 각자 자기들이 있던 학교로 돌아간 다. 대개가 서양인 집에서 일을 하며 공부하는 ‘스쿨 보이’들이었기 때문에, 서양 가정으로 돌아간다. 스 쿨보이 일을 하면 일주일에 2~3달러를 받고,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한인소년병학교를 거쳐간 학생들 한인소년병학교를 거쳐간 한인 학생들은 대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