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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영 의병장은 1873년 지금의 아지동 전의 이씨 유가가문에서 태어나 열심히 수학한 후 27세(1900)때 문과, 31세(1904)때 무과에 각각 급제했으나 32세(1905)때 일본의 침략적 야욕인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선비로서 울분을 참지 못해 국권을 회복해야겠다는 각오로 의병장이 됐다. 또, 3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강원도 영월, 충북 영춘, 단양, 경북 영주, 풍기, 순흥, 예천, 상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일본 헌병 소장 이하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고 일제의 앞잡이들을 소탕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1909년 11월 일제에 체포됐다. 이후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1910년 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상고했으나 기각, 1910년 2월 24일 교수형이 확정되자 그 자리에서 “나는 내 목숨을 더러운 일본인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고 말한 뒤 혀를 깨물어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자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해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 영주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