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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석탄광 와이오밍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 95 에서 일을 하는 한인 노동자들도 ‘태동실업주식회사’의 주식을 매 입하였다. 슈퍼리어 석탄광의 한 인 15명이 1909년 5월 태동실업 주식회사 주금 35주를 매입하기 도 하였다. 태동실업회사가 한국 의 앞날에 주춧돌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주식 매입에 일심정력 을 기울렸다. 그래서 그해 8월에 도 36주를 매입하고 주식금 200 여 달러를 거두었다. 또한 슈퍼리어의 한인 22명은 1910년 기본금 3달러씩을 거두 어 기본금을 삼고, 매달 50센트 씩 월연금을 내어 제조운동을 권장하는 소년병학교 (청년병학회)를 조직하였다. 슈퍼리어 소년병학교는 1911년 5월 15일 학생을 모집하고, 16일 군대를 조 직하였으며, 17일 학원을 만들고, 19일 공부를 시작 하였다. 박장순이 슈퍼리오 소년병학교의 재무를 맡 았다. 슈퍼리어도 락스프링스 석탄광과 마찬가지로 노 동이 매우 위험했다. 1909년 5월 13일 이태석이 중상을 입고, 락스프링스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7 월 초에 퇴원하였다. 슈퍼리어 석탄광에는 일찍이 김신우·한성범·박장순 등이 자본을 모아 합자회사 를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탄광에서는 잦은 사 고가 일어나, 1911년 7월 손경춘이 탄광에서 일 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1916년 슈퍼리어 석탄회사 (Superior Coal Company)와 유니언 퍼시픽 석탄 회사(The Union Pacific Coal Company)가 합병하 면서 890,735톤이 생산되었다. 슈퍼리어에는 다섯 개의 다른 탄광이 있었다. 슈퍼리어 석탄광 회사에 서는 탄광산업이 점점 발달하면서 한인 노동자들을 모집하였다. 석탄광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4달 러 44센트, 갱속에서 일을 하면 5달러 80센트를 받 았다. 만일 도급을 하면 매일 7달러에서 10달러까지 벌 수가 있었다. 슈퍼리어 석탄광 한인들의 애국심 슈퍼리어 탄광회사에서는 한인들을 매우 신뢰하 였다. 미국인 회사에서 한인들을 믿음직한 노동자로 인정한 이유는, 박장순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다. 박장순은 슈퍼리어 석탄광에 들어간 이후 10여 년 동안 너무나 성실하게 일을 하여, 탄광회사에서 는 박장순을 표준으로 보아 한인들에게 노동을 시켰 다. 그래서 슈퍼리어 석탄광에는 30~40명의 한인들 태동실업주식회사의 주식(안필립)(독립기념관 소장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