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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➋ • 미국 네브라스카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다 95 유일한과 정양필이 입학했다. 캘리포니아·콜로라도· 오하이오·미시건·뉴욕·펜실베니아·일리노이 등 미국 각지에서도 한인 유학생들이 입학했다. 1910년 소 년병학교의 생도는 26명으로 2배가 늘었다. 모든 생 도들은 카니에서와 마찬가지로, 헤이스팅스에서도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군사교육과 일반 학과를 배 웠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생도들은 어린 나이이지만, 조 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군사훈련을 받으 러 왔다. 그런데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자 박용만이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의 기관지 『신한민 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리 고 다음해인 1912년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로 가면서, 소년 병학교는 박처후가 교장을 맡게 되었다. 한인소년병 학교는 후원자와 지도교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 면서 학교를 더 이상 운영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일 본 영사가 헤이스팅스대학을 찾아가 한인 유학생들 이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는다고 하면 서 학장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헤이스 팅스 대학에서도 더 이상 한인소년병학교에 대학 시설을 빌려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한인소년병학 한인소년병학교 생도들의 훈련 광경(이상 뉴스앤조이 제공)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교장  시절의 박용만. 왼쪽에는 그가 지은  한시가 적혀있다. 소년병학교 관련 미국 지역 언론의 보도 기사(The Hastings  Daily Republican 1911년 10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