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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 남강 이승훈의 삶과 교육구국운동 95 친 실천적 교육자였다. 조만식의 오산학교 헌신과 이승훈 · 조만식의 민립 대학 설립운동 전개 이 무렵, 고당은 학생들에게 “예수님이 우리 인간 에게 주신 교훈은 ‘눈물과 땀과 피’임을 강조했는데, 눈물은 동정과 사랑을, 땀은 땀 흘려 일함을, 피는 희 생을 의미합니다”라고 강조하면서, 교육에 매진하 였다. 고당의 교육열은 오산학교를 놀랍게 변화시켜 나갔다. 학생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언제나 앞장서서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학교 전체가 검소한 기풍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과 교장 고당의 교육이념은 조선민립대학 설립추진에도 잘 나타나 있다. 1922 년 11월, 남강과 고당은 한규설 · 이상재 · 김성수(金性 洙) · 한용운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 하고, 대학설립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그 이 듬 해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0여 명이 서울 종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 학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발기취지서를 채 택하였다. 이 발기취지서에 “우리의 운명을 여하히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들 일 이 모두 다 필요하도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이 교육이 아닐 수 없 다. ……”라고 밝혔다. 그런데 일본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남강의 교육구국은 오산학교 를 통해서 계속되었으며, 오늘까지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제2세 교육에 일생을 몸 바치신 남강 이승훈은 1930년 5월 9일 영면의 길에 들었다. 그 때가 향년 67세였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 ٠ 법과대학장 ٠ 산업 노사대학원장 ٠ 행정법무대학원장 ٠ 부총장 ٠ 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 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 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 포럼 대 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필자 권용우 1915년 경 오산학교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당시 이승훈(국사편찬위원회 「감시대 상 인물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