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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사 ➊ • 김대락의 백하일기 ④ 95 거처로 가버렸다고 한다. 고향 소식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오후에 손자 아이를 그의 집으로 보냈다. 국내 정세를 알아보려 해서이다. 3일 맑음. 날씨가 화창하여 가상(街上)에 나가 보았다. 울적 함을 씻으려 해서일 뿐 아니라, 책가게가 있다고 하 니, 사서 볼거리로 삼을까 해서이다. 저자의 가게를 두루 돌아보니 모두 경사자집(經史子集) 같은 읽을 만한 책이 아니고, 점서(占書)와 상법(像法), 패설류 (稗說類)를 모두 찾아 한데 쌓아 놓았는데, 책표지에 사람의 진상을 그린 그림책들이 차마 바로 보지 못할 정도이다. 드디어 가게와 화물 창고를 대략 구경하는 데 길가의 밭 가운데 달래가 매우 무성하다. 그래서 나무 송곳을 만들어, 지팡이를 세워둔 채 그것을 캐 니, 잠깐만에 거의 두어 줌이나 되었다. 돌아가 집 젊 은이들에게 맡겨 반찬거리를 장만케 하니, 참으로 가 소롭다. 윤인보가 우거(寓居)로부터 와서 고향 소식을 전하 였다. 노중에 경찰이 있을까 염려하였던지 편지 한 통 부쳐 온 것이 없었다. 비록 입으로 전한 소식을 들 었으나 상세하지가 않다. 조카들이 온다고 해놓고 오 지 않는다.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주실(=영양군 일월 면 주곡리)의 조범용(趙範容)과 조하기(趙夏基)가 오 후에 들어왔다. 4일 날씨가 온난함. 정공(=정원하) 집에 가서 일경(一頃) 쯤 대화를 나 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릉의 임시 거처에 가려다 가, 물에 다리가 없어 다시 돌아왔다. 길가를 두루 돌 아보는데 문득 병사의 무리 수십명이 나타나 총을 메 고 앞을 지나갔다. 일병(日兵)과 견줘보건대 거의 정 예의 사나운 기운이 없다. 중국의 쇠미한 상황을 끝 내 알 수 있었다. 만약 남의 나라를 잘 엿보는 자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한다면, 장차 뭐라 하겠는가?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대고산(大孤山)에서 조 직된 서간도 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경학 사(耕學社)의 본부 터(독립기념관 제공).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이동구) 초 상화. 그는 이상룡을 도와 서간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출 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대락 일가와 교류하며 서간도  독립운동에 앞장선 이장녕. 그는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 다.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교관 으로 근무하면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